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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Feb 22. 2022

갤러리에서 나온 여자

3. 호루라기

고양이가 동그랬던 척추를 길게 뽑아 늘어뜨려서 스트레칭을 하듯이 그녀도 녹색 암체어에 웅크려 앉아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워 본다. 따뜻한 햇살이 녹색 의자의 오크 빛 팔걸이에 한 줌 내려앉고 접혀 있던 바닐라 커스터드 색과 귤빛의 털로 짜인 스웨터가 본 모양새를 찾듯이 스르륵 그녀의 몸 위로 펼쳐진다. 그대로 온몸을 일으켜 세워 어린 나무처럼 두 팔을 쭉 뻗어 햇살을 더 흡수하니, 태양을 바라보고 눈 감은 그녀의 두 볼이 그녀가 입은 스웨터 색으로 진해졌다. 그대로 몇 분쯤 지나자 어느 순간 밤이 온 듯이 눈앞이 적막해지고 그녀는 눈을 조심스레 떴다. 녹색과 밤색이 커튼이 드리워진 것 같은 신비로운 두 눈동자가 구름이 뭉게뭉게 핀 태양 쪽을 응시한다. 쫓기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대기는 눈부신 태양을 드러내고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서 있는다.


그림 액자 속에서는 간혹 오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기 바빴다. 그녀는 그녀를 볼 수 없었지만 간혹 어떤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투영하여 스스로를 상상하고 예측하곤 하였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꽤 행복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그녀는 그걸로 충분했다. 나를 보는 얼굴들에 알듯 말듯한 미소가 일랑일 때 나는 꽤 괜찮은 모양새를 가졌는가 보다 하고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그 수많은 모를 얼굴들이 나를 보고 일그러지는 일이 많았다면 그녀는 너무나도 외로왔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그녀를 투영해보며 대체로 만족과 안위를 느꼈다.


하지만 무엇인지 모를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를 보러 주기적으로 오던 한 사람, 그 얼굴은 짙은 회색 모자챙 안에서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가 처음 갤러리에 걸린 후에는 매우 자주 보았지만 여러 날, 여러 달이 지나도 보기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 사람을 찾아야겠다. 그 사람이 갤러리에 오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본 것이 사람들이 민소매를 입고 다니던 때였으니 작년 여름쯤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었다. 새싹이 열리듯 두 눈을 뜬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라운지 테이블에 놓여있던 크림색 커피머신으로 갔다. 먹다 만 차가워진 커피가 담긴 머그잔 옆으로 달력 카드가 놓여있었다.


하얀 스카프가 휘날리는 푸른 바닷가 사진이 프린트된 작년 7월 달력 카드가 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떤 연유로 이 달력은 7월 이후로 넘겨지지 않았을까. 지금은 해를 넘긴 1월이었다. 7월의 달력 카드를 들자 지그재그로 연결된 다음 달들이 올라온다. 그녀가 손가락을 살짝 놓자 다시 차르륵 제자리를 찾아 접혀갔다. 찹 하고 맨 위의 카드가 접히자 금테가 둘러진 한 장의 종이가 스르륵 떨어져 나왔다.


'모든 것을 누려,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Indulge yourself in all here, all the single seconds'



글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자, 열쇠 패드에서 본 것 같은 연녹빛의 세로줄이 카드의 좌우로 움직이자 모래 위 글씨처럼 파도에 씻기듯이 사라졌다. 그녀는 놀라서 카드를 떨어뜨렸지만 다시 줍자 집의 평면도가 보였다. 이 집에 도착한 후로 며칠간 갤러리에 걸려있던 하얀 캔버스와 같이 생긴 아늑하고 푹신한 하얀 침대에서 잠을 푹 자고 커피머신 사용법을 읽어 막 사용법을 알아내어 몇 번 내려마시고 누군가 오기를 창가의 녹색 암체어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아직도 커피는 맛이 없지만 커피를 내릴 때의 번지는 원두향은 좋았다.


이 집의 평면도라, 아무리 혼자가 익숙하지만 조금 망설여지긴 하였다. 그때 햇살이 비추는 거실 한쪽에 놓여있던 하얀 러그가 야옹하고 울었다. 꼬리를 우아하게 들어 올리더니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와서 꼬리로 그녀의 바지를 살짝살짝 건들며 그녀 곁에 무심한 듯 앉았다. 무릎을 꿇고 고양이 얼굴을 바라보니 왜인지 모를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녀도 손가락을 뻗어 고양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본다. 고양이 목에 걸린 녹색 가죽 줄에 동그란 은색 메탈이 걸려있다.


'나무집의 호루라기 / Whistle from Tree House'  


야옹

야옹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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