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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Sep 20. 2022

갤러리에서 나온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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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땡, 루땡, 에르땡 명품 샵이 즐비한 Bond Street에는 명품샵을 갈만한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갤러리 또한 많다. 다림선이 반듯하게 선 수트를 입고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잡고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번거롭게 달린 것 없이 깔끔하게 유모차와 그 속에 아이만 밀고 가는 젊고 예쁜 엄마들의 동선이 사방으로 모였다 흩어진다. 끝을 올려다볼 수 없는 서울 중심가의 고층빌딩과 다른 천장이 꽤 높은 옛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일렬로 늘어선 4, 5층 정도의 회색빛 석조 건물들이 즐비한 메인 거리, 그 안 골목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갤러리와 뱅크시가 15억에 낙찰된 자신의 그림을 즉시 파쇄한 걸로 유명한 경매회사인 소더비도 있고 더 가면 크리스티도 있는 곳.


갤러리는 박물관과 달리 고귀한 예술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오늘의 경제적 가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생동감이 있다. 배울수록 더 보이는 박물관이 학교라면 직관과 선호에 따른 동시대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갤러리는 시장이다. 정기적인 아트페어, 예술 경매, 조금 더 우주맛을 더한 NFT까지. 박물관이 예술을 엄숙하고 뻣뻣하게 만든다면 갤러리, 아트페어, 경매시장, NFT는 예술을 더 감칠맛나게 살아있게 만든다고 할까. 삶에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의식주 걱정 없고 자식 교육 걱정 없고 그 후에도 충분히 잉여가 발생한다면 하얀 캔버스 위로, 둔탁하고 매끈한 형태와 질감 위로 흐르는 개성과 기술이 집약된 창작품을 사고 소유하는 것. 예술을 사고 파는 것은 매슬로우가 말한 인간 욕구의 정점, 자아실현의 현장이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사치와 호사를 누리게 해주는 것은 예술을 소유하여 독점하거나 혹은 공유하는 것이리라. 무지개 빛의 팔딱거리는 대어를 잡아 올렸을 때의 쾌감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갤러리도 사람처럼 각자의 스타일과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가끔은 기대보다 뛰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훨씬 실망스럽기도 하다. 소위 땅 보러 다니는 사람처럼, 그럴 듯하게 갖춰 입고 이 갤러리 저 갤러리 방랑하다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평범한 정사각형의 홀을 지나 좁아지는 홀을 따라 안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다시 넓어지는 홀이 나오던 갤러리. 사방에 큼지막한 얼굴들이 갤러리의 빈 공간을 응시하는 듯한 그 중앙 홀에 약 60센치 정도 되는 황동 조각이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고글이 달린 항공모를 머리에 쓰고 가방을 손에 쥐고 어디론가 떠나는 남자와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슬픈 얼굴의 여자. 서로 엇갈려 있는 끔찍한 이별이다. 아마도 어떤 상황 속에서 피치 못하게 이별하는 남녀가 아닐까. 그들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차갑게 조각하여 영원히 기억하려는 누군가의 영혼이 담긴 조각상.




2022년 2월의 중반, 아직 차가운 공기가 쨍하고 따뜻한 햇살이 부딪혀 일렁이는 아침, 그 갤러리의 문이 열리고 십여분이 지났을 때 진회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갤러리 문을 열었다. 마침 오늘 몸이 좋지 않아 병가를 써야 한다는 동료의 이메일을 읽어 내려가던 갤러리의 매니저는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펴고 고개를 들어 신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간단한 눈인사 후 익숙하다는 듯 홀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와 둔탁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황동조각상 앞에 섰다. 응시한 지 3분쯤 지났을까, 안개가 낀 듯 알 수 없는 그의 턱에 미세한 떨림이 보이는 듯하다 이내 돌아서서 매니저에게 황동조각과 2개의 그림을 모두 구매하겠다고 한다. 매니저는 자칫 피곤할 뻔했던 하루의 시작이 꽤 상큼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내 혼자 있음을 곱씹으며 노련하게 친절히 양해를 구하고 입구의 'open'싸인을 'closed'로 돌리고선 진회색 코트 입은 남자에게로 돌아왔다.


조금은 버퍼링이 걸린 듯한 매니저는 이 신비로운 콜렉터와 대화를 좀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이 아티스트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라고 말문을 열어보았지만 남자는 긴 대화는 반갑지 않다는 듯 '잘...? 글쎄요.'라는 짧은 말을 내뱉었다. 눈치 빠른 매니저는 작가 정보가 담긴 팸플릿과 주문서 작성을 위한 종이를 준비하였다. 차 한잔을 권하던 매니저에게 남자는 물 한 컵이면 된다고 하고 그 역시도 거의 입에 데지 않았다. 배송을 어떻게 할지 묻는 직원의 질문에 남자는 오늘 갤러리가 닫기 전까지 포장이 가능한지 물었다. 입체 조각이 포함되어 특수 포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통 2-3일은 소요될 것이라 잠시 대답을 망설였지만, 남자의 두 눈에 인 거센 바다 파도에 밀려난 빈 페트병처럼 최대한 빨리 포장을 완료하면 내일 아침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배송 주소를 묻자 내일 아침 갤러리가 문을 열 때쯤 픽업용 벤이 와있을 것이라고 벤 번호와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건네주었다. 반짝거리는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전액 결제를 완료한 후 남자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 배웅을 하고 입구의 'closed' 싸인을 'open'으로 돌린 후 손목시계를 확인 했을 때 28분여가 지나있었다.



지난밤 야간 포장작업을 마친 조각상과 그림이 갤러리 입구 홀에서 기다리고 있다. 검은색 벤은 10 전부터 갤러리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갤러리 문이 열리자 운전석 창이 내려가고 운전기사가 손에  일회용 종이컵 위로 희미한 김이 올라오는  하다. 벤에서 내린  남성이 갤러리 문을 열었다. 어제보다 피곤한 기색이 짙어진 매니저는 포장이 완료  작품들을 가리켰다. 세부사항을 확인한 ,  남성이 벤으로 돌아가 노란색 돌리를 가져왔다. 붉은 타투 같이 영원한 이별을 새긴 커플 조각상은 순식간에 다른 작품들과 함께 짙은 녹색 밴드와 빨간 클립으로  안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매니저와 배송회사 직원들이 인수증에 서명한 , 벤의 엔진은 쿠르릉 시동을 걸고 길을 떠났다. 잠시 멍한 눈으로 벤이 골목을 꺾어  도로로 진입하는 것을 보고 있던 매니저는 이내 빨간 이층 버스, 식료품 배달차와 까만 런던 택시들이 번잡하게 양방향으로 교차하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매니저의 손에 들린 인수증에 적힌 구매자 이름을 나지막이 읽어내려 보았다.

Nam Woo... Nam Woo...



  



    

...




(다음 편에 이어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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