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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Feb 01. 2022

갤러리에서 나온 여자

2. 아치문이 열리다

따뜻한 햇살이 그녀의 정수리 위에 앉아 포도마냥 영글고 있다. 그간 캥하게 차가웠던 공기와 세차게 휘갈기는 겨울바람에 혹사당한 맷집 좋은 적흑색의 토양도 물을 조금만 뿌려 적셔주면 싱그럽게 들이킨 후 토해내어 연둣빛의 새 이파리를 피어내울 듯한 햇살. 적도와 사막의 이겨 내기 힘든 타오르는 태양이 아니라 지리한 겨울을 이겨낸 생명들을 옹곳이 따듯하게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햇살이다. 감미로운 햇살이 아기의 보드라운 살결 같은 그녀의 팔뚝 위로 한 줄, 적절하게 주름진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다 한 줄 한 줄 내려 닿는다. 보일 듯 말 듯한 솜털을 파도 타듯 유연하게 비쳐내려 와 그녀가 들고 있는 투명한 물 잔에 부딪치고 부서져 흡사 태양을 머금은 호수처럼 너울거린다. 


어쩌면 런던의 1월은 이토록 다른 겨울과 봄을 저울질하며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힐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듯 말 듯, 그 곁을 내어줄 듯 말 듯. 런던의 1월은 서울의 5월 일수도 있고 북극의 7월 일수도 있다. 장소는 달라도 대지와 공기가 차가움에서 따뜻함으로 이동하는 그 감미로운 순간은 어디에나 있다. 수많은 햇살의 노출 속에서도 이 시기의 햇살이 주는 의미를 꼭 챙겨야 한다. 이 생명력 넘치는 햇살은 큐피드의 사랑의 화살과 같아서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 갤러리에서 본 수많은 캔버스들도 햇살이 쓸고 간 수많은 공간에 담긴 빛의 형태와 의미를 꽃병에 꽃을 담듯 담아내려 하니까. 


창가의 녹색 암체어에 앉아 햇살을 만끽하고 있노라니 그녀도 모르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는 걸 느낀다. 그대로 잠들어서 눈뜨지 않으면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을 가게 되는 것일까. 장난치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려본다. 햇살은 아직도 거기 있다. 이대로 잠들 순 없지. 딱 일주일 전 그림에서 나온 그녀였다. 어깨를 동글동글 돌려서 쭉 뻗어 스트레칭하고 다리를 들어 올려 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본다. 멈추어 바라만 보던 그녀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달콤한 햇살을 피부에 꼭꼭 눌러 담으며. 


커피 테이블 위 차가운 금속 열쇠를 들고서는 아직도 신기한 듯 새겨진 레터링과 주소택을 만져보았다. 'Yours' 'The Tree House, 17 Back Lane, Just turn around the corner from where you are (작은 약도)' 골드 신용카드가 나온 노란 레인재킷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것이였다. 일주일 전 카페에서 추적거리던 빗방울을 정신없이 쳐다보다 지겨워졌을 때쯤 한쪽 주머니에서 찰크렁 거리는 소리에 찾은 열쇠였다. 카페에서 나와 열쇠에 달려있는 조그만 약도를 따라가니 약도에 나와있는 집이 나왔다. 


잠시 멍하게 게이트를 쳐다보고 있자니 오른쪽 측면에 납작한 센서 패드가 있고 열쇠의 레터링과 같은 글씨체로 The Tree House가 적혀 있다. 이어 17 Back Lane이라고 글자가 바뀌더니 '열쇠를 터치하시오'라고 은은한 오렌지 불빛이 반짝거렸다. 게이트가 철컥 열리고 조금 걸어 들어가자 하얀 회벽에 The Tree House라고 금속 레터링이 박혀 있다. 약간 길게 자란 수풀을 헤치고 회색 디딤돌을 12개쯤 밟고 들어가자 커다란 오크색의 아치형 나무문이 나타난다. 기린 얼굴 손잡이가 달린 문을 응시하노라니 기린의 눈이 왼쪽 하단의 터치패드를 가리킨다. 가느다란 빛이 세로로 훑고 지나가며 또 다른 가로 패드가 나온다. 열쇠를 올려놓자 다시 한번 빛이 열쇠를 훑고 찰칵 문이 열렸다. 




...


(다음 편에 이어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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