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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Dec 24. 2021

마흔의 면접

11. 궤종 시계와 톱니

멈추어 있던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로비에 도착한 승강기 문이 열리고 이메일과 전화로 내적 친분이 쌓인 채용담당자가 나온다.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은 얼굴이다. 인사 담당자의 특유의 친절함으로 승강기로 안내하며 한국에서 영상으로 면접에 참관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웬만해서는 긴장 잘 안 하는 편임에도 누군가 나를 카메라 화면으로 관찰하고 있다고 하니 통제된 실험실에 입장하는 기분이다. 면접 대기실의 위치를 확인한 후 양해를 구하고 잠시 화장실로 향했다. 녹색 버튼을 눌러 입구를 다시 나가자 하얀 복도 중간쯤에 똑같이 생긴 문 중 하나가 화장실이다. 볼일을 마치고 손을 씻으며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얼굴은 비록 푸석했지만 눈빛은 나쁘지 않다. 거금을 들여서 마련한 정장 재킷의 새 울 냄새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올해 들어 제일 잘한 일이 아닐까. 면접에 떨어져도 이 브랜드 재킷 하나는 평생 남으리라.    


우우우우우우웅


항상 과도할 정도로 시끄럽게 돌아가는 핸드드라이어에 손을 말리다가 귀가 아파 멈추고는 남은 물기를 바지에 톡톡 털어낸다. 아차 하고 바지에 물 얼룩이 지지는 않았나 확인한 후 문을 열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간다. 면접 전 날 갑자기 만점 답안을 만들 순 없지만 생각을 많이 해보려고 했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 내가 속한 팀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나는 어떤 일을 맡게 될까, 나의 강점은 무엇일까 약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볼수록 꽤 흥미로울 것 같았고 기대되었다.


어젯밤은 저녁을 차려 먹이고 식기세척기에 빈 그릇들을 쌓으며 내 맘 속에는 질문이 늘어갔다. 예상 답변을 준비하기도 바쁠 타이밍에 질문이라니. 마침 아이들 물병에 물을 채우고 있는 남편을 붙잡고 맘 속의 질문을 대신 해보았다. 대화 속에서 어떤 통찰을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올해 들어 제일 못한 일이리라. 그날 남편의 컨디션이 나빴거나 원래 그런 인간이었거나. 그는 마침내 답답하다는 듯, 나는 큰 궤종 시계 가장 밑단 톱니란다. 쓸데없는 질문은 집어치우고 해야 할 일이라고 주어지면 그걸 잘하면 된단다. 나름 고소득 전문직 상위 레벨에 있다는 사람 입에서 나오는 이토록 살벌하고 건조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화도 나고 힘도 쭈욱 빠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대기실 책상 위에 면접자 명단과 생수병을 바라본다. 면접자 여섯 명, 사각표 안에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고 먼저 온 3명의 이름 오른쪽에 시작 시간, 마친 시간, 서명이 되어있다. 마실 것이 필요한 지 묻는 채용담당자에게 집에서 담아온 물이 든 물통을 꺼내 보였다. 플라스틱 생수병, 이제는 없어져야 할 대표 민폐 아이템이지만 또 코로나 시대에 어울리게 각 병에 격리되어 접촉을 줄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챙길 수 있기에 역설적으로 꽤 유용해 보인다. 가만, 내 앞에 세명의 면접자라…


“대학졸업증명서 등 관련 서류를 주시면 카피 후에 원본은 가져다 드리죠.”


“괜찮습니다. 원본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가방 위로 고개가 빼꼼히 나온 황토색 서류봉투를 꺼내어 서류들을 추스려서 건넨다. 나의 20대와 30대가 축약된 대학졸업증명서와 경력증명서 등의 몇 장의 종이를 보며 가정주부와 엄마라는 커리어도 이렇게 증명서가 발행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이 종이가 뭐라고. 하긴 계획이 있는 사람이면 일리노이 주립대 응용미술학과는 이 종이 한 장으로 나오지 않는가. 어떻게 보면 능력자와 사기꾼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걸.


드디어 앞 선 면접이 곧 끝난다는 말을 듣는다. 약간은 자본주의적 미소를 장착한 한 여성이 면접을 마치고 대기실로 온다. 저 미소는 면접을 잘 본 사람의 것일까? 저 사람이 합격자가 될까? 물통을 다시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재킷 끝을 만지작거려본다.




면접실 유리문 너머로 긴 책상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이 빼꼼히 고개를 돌려 들어오는 나를 본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의 투명 상자에 넣고 세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의자에 앉는다. 주어진 면접 시간은 길지 않은 15분 내외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왠지 자기소개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면접장의 경직된 분위기가 심각했다.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을 사람 혹은 사람들은 나만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누가 봐도 영어 잘하는 유학파일 것 같은 뽀얗고 젊은 면접관 한 명, 나보다 더 긴장한 듯한 사람 좋아 보이는 정수리 가발을 쓴 면접관 한 명, 재야의 무림고수 같은 매서운 눈을 가졌지만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게 보이는 면접관 한 명이 눈에 보였다. ‘안녕하세요’라는 말 후에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질문으로 넘어갔다.


“OO 씨는 우리가 무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주세요.”


문장 하나로 나를 완전히 후두려패는 것 같았다. 그것이 알고 싶어 찾아온 사람에게 역으로 그 질문을 호쾌 명쾌하게 한다. 포털이나 위키백과에 나오는 원론적인 대답을 원해서 물어보는 것은 아닐 텐데, 왜 한낱 면접자에게 물어보는 것일까. 나는 저 밑의 톱니라는 멋대가리 없는 남편의 말에 사색을 멈추지 말아야 했었을까. 뚜껑이 닫힌 그릇 속에서 높게 점프하는 법을 잊은 개구리처럼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려고 온 사람 수준에서는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내가 얼마나 모자란 지 깨닫게 되자 이후부터는 기억나지 않는 바보 같은 말을 지껄였다. 뽀얀 유학파 도련님의 눈빛에서는 나를 향한 조소도 지나간다. 못 하는 영어는 말하려고 하는 알맹이가 없으니 더욱 베베 꼬여간다. 나를 어필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사무소 출근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르렀을 때에는 자포자기의 마음이다. 채용 공고에 재택근무라고 되어 있어서 지원했다고… 출퇴근이 가능할 것이라는 여지도 주지 않았다. 최대한 출퇴근이 가능하도록 학교, 내니 등을 적극 사용하려고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떨어진다면 능력 부족이 아니라 출퇴근 문제 때문인 것처럼 여겨서 패배감을 줄이려는 심리적 꼼수를 부려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궁금했다. 왜 정말 일개 직원에게 그런 거창한 질문을 할까. 반대로 기관 혹은 회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각 개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알려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아님 실제로 요즘 구직자들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일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 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머릿속은 이미 진흙탕처럼 뒤섞였지만 내 입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내뱉고 있었다. 남을 돌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일까 이들의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마저 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있는 이들도 얼마나 힘들까. 오전 내내 이렇게 바짝 긴장해서 여기 앉아있었을텐데 더 최선을 다해서 지껄여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올라온다. 신중해야 할 말들은 자꾸 가벼운 말들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플라스틱 박스에 들어있는 폰을 집어서 면접장을 나온다.




면접자 명단에 면접 완료 시간을 기입하고 서명을 하고 나니 각 면접자에게 배정된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다른 면접자들은 모두 20분, 나에게만 30분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기대를 했었을까, 단지 면접 사이에 조금 더 휴식이 필요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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