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리 Dec 14. 2021

마흔의 면접

10. 빌딩 숲

'다음 역은 뱅크, 뱅크입니다. 센트럴, DLR, 워털루와 시티 방면으로 갈아타실 분은 이번 역에서 내리시기 바랍니다.'


런던이었지만 갑자기 이십 대 초반 배고픈 대학생이던 시절 종로3가역이 생각났다. 대학 졸업 후 사회가 얼마나 냉기가 감도는 곳인지 모르고서 잠시 그럴듯한 연애를 꿈꾸었다. 그때 내가 바라보던 사람은 대학 졸업을 한 달 남겨두고 구직 중이었다. 그 남자는 좔좔좔 복개천이 흐르는 청계천 가에 서서 내가 아닌 우리를 내려다보는 네모나고 커다란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연인이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함께 응시하는 것이라고. 그와 나는 한 곳을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호감을 떠나서 현재 관심사가 달랐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 달랐다. 차가운 빌딩 숲을 고고히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언제 들어도 낯부끄러운 말, '바보'라고 심지어 입 밖으로 내뱉고 종로3가역에서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간지러운 그때의 기억.


오늘 아침은 다른 곳을 바라보던 그 사람이 아닌 남편과 함께 런던 지하철을 타고 빌딩 숲을 향하고 있다. 낮고 동그란 천장은 키가 큰 사람은 구부정하게 서 있게 만들었고 한 겨울에도 후끈하고 뭉근한 공기가 쇳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이코노미 클래스 탑승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효율적으로 설계된 몸을 가졌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던 작은 체구의 남편이 이 조그맣고 오래된 런던 지하철에 제법 잘 어울려 보인다. 우리는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는 지하철에서도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바쁘지만, 도착지는 같기에 함께 하기가 군더더기 없이 편안하다. 마치 특수임무를 맡은 팀처럼 마스크를 쓴 채 눈빛 하나로 의사소통을 해낸다. 다음 역이니 내릴 준비를 하라고.


우여곡절 끝에 발급한 대학 졸업증명서 원본이 들어있는 서류 봉투가 까만 가방 위로 빼꼼히 삐져나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함께 출근이라는 감상에 젖어 잊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 마흔에 런던에서 면접을 보러 가는 중이었다. 뱅크 역에 내려 수많은 맨 인 블랙과 우먼 인 블랙 사이에서 효율적으로 설계된 몸을 가진 남편을 따라 출구를 찾아 미로에 들어섰다. 눈 감고도 출구를 찾을 기세의 군중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두터운 재킷과 캐리어를 끄는 여행객이라면 출퇴근 시간 빌딩 숲에 멈추는 전철역은 피해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구불구불 역을 빠져나온 후 옅은 한숨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정말 면접을 보는 곳에서 한 블록 너머에 남편 회사가 있었다. 40분은 일찍 도착한 덕분에 남편을 회사에 보내고 면접 볼 회사의 건물을 확인한 후 바로 맞은편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간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 한잔을 시켜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무슨 맛으로 이 쓴 커피를 마시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향을 맡는다면 모르겠지만 마시기에 커피는 적합한 음료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무언가 빌딩 숲에 들어왔다면 최소한 커피 한 잔은 다 필요한 것 아니냐는 암묵적인 동의를 한 것 같았다. 모락모락 고소한 커피 한 김에 부족한 잠에 대한 각성 한 줄 또 다른 한 김에는 아이로부터 자유로운 내 두 팔의 분리를 축하하기 위한 한 줄, 뽀얗고 길다란 두 김이 번져 올랐다.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얼마 안 있어 전화벨이 울렸다. 곧 면접을 보러 갈 회사의 번호였다. 지금이라도 내 면접이 취소되었다고 알리려는 게 아닐까.




'혹시 면접 시간을 당길 수 있을까요?'


'네, 마침 제가 회사 근처에 있습니다.'


'그럼 10시까지 오실 수 있으신가요?'


'네 가능합니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뜨거운 커피의 향을 콧 속 깊숙이 두어 번 들이마시고 내려놓았다. 앞선 면접자의 면접이 맘에 들지 않아서 빨리 끝낸 것일까. 왜 시간이 당겨진 것일까. 내가 남편의 재촉에 일찍 도착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휑한 4차로의 길을 건너 사무소 건물의 로비에 들어섰다. 코비드 이후 투명 플라스틱 가림막이 설치된 리셉션 데스크에 방문 목적을 말하고 로비의 길게 누운 각진 소파에 살포시 앉았다. 처음 입은 정장 바지에 주름이 가지 않도록.







'다음 이야기에 이어집니다...'       


   





이전 09화 마흔의 면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