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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Dec 06. 2021

마흔의 면접

8. 호구의 종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테스트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두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시험에 응해주어서 고맙고, 궁금한 것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아, 쓰다.


인생이 이렇게 쓰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짧게나마 일했던 영역의 테스트인데 어떻게 이렇게 한 번도 통과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여러 번 찬찬히 생각해도 도대체 감점이 어디서 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더 큰 문제다. 첫 번째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해서 물어봤을 때, 회사 방침상 어느 부분에서 감점이 난 것인지 비공개라고 하였기에 무엇이 틀렸는지 알 수도 없고 고로 개선할 방법이 없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4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 미달이 나왔는지 믿을 수가 없다.


한국의 수많은 경쟁 프로그램들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거기에 나오는 수많은 스토리와 캐릭터들 중 가끔 나오는 엉뚱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심사위원들을 당황스럽게 할 만큼의 부족한 실력을 가진 참가자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상황.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이 아닐까.


연속적인 실패로 감정이 무겁게 가라앉고 나니, 문득 20대 때 이런 패배감을 밥 먹듯이 느꼈었지 하고 생각이 난다. 특히 대학 졸업이 가까워오던 구직 시즌에는 매일매일이 그러했다. 그렇게 이력서를 보기 좋게 가다듬고 구애를 하여도 족족 거절을 당하니 마치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조차도 사라질 듯했던 그 시절. 하지만 그때에는 구직 활동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 둔탁한 취업의 문이 열릴 때까지 손등이 까지고 목이 쉬도록 두드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소설처럼 내일 아침이면 진짜 '버러지'로 변해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또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구직을 할 때에는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 일을 해보지 않았기에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가능성이 존재했다. 실제로 기업들이 나를 얼마나 안다고 일을 시켜보지도 않고 나에게 'No'라는 딱지를 씌우는가. 당시에는 뭐든지 시켜만 준다면 잘 해내겠다는 '오기'와 '패기'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일을 한다는 것이 무언지 몰랐기에 일 자체라기보다는 빛나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동료들과 점심을 헐레벌떡 먹고 테이크 아웃 커피 한잔 손에 들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가는 판타지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언정.


그런데 지금 소위 경력자로서 4번이나 받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지 못함으로써 '실력'도 없으면서, 주 양육자로서 상황에 따라서 어느 정도 유연하게 일 할 수 있는 업무 환경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 실력이 좋은 경력자들, 가능성이 넘치는 파릇파릇한 지원자들, 아이들 없이 일에 올인할 수 있는 사람들, 어떤 일이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간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하여 일자리를 쟁취하고 아이들도 돌보고 내 커리어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신기루를 쫓고 있던 것이었다. 세상을 호구로 알고 열심히 구직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 그게 나구나.  




그 판에서 누가 호구인지 모르겄으면 니가 바로 그 호구다.

-미스터 선샤인-



머릿속에 종이 울린다. 그 호구가 바로 나로구나. 이제 그만 이 판에서 나와줘야 하는 거 아닐까. 그 사람들에게로 일자리가 가는 게 순리에 맞다. 나를 응원해주던 다른 엄마들이 떠올랐다. 엄마라는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그녀들에게 무어라고 해야 할까. 자조와 체념의 말로 나도 그녀들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엄마 그 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이 실패라는 딱지를 붙이고 유쾌하고 호기롭던 과거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 차라리 아무런 딱지도 붙어 있지 않던 매일매일이 기분 좋던 나로 계속 남아있었으면 어땠을까.





'다음 이야기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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