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면접날 아침
여러 번의 번역 테스트에 떨어지며, 그 사이에 다른 회사의 면접을 보았었다는 사실도 흐릿해져가고 있다. 이미 지정되어 있던 면접 예정일을 앞둔 주의 목요일, 면접 장소와 시간을 자세히 안내하는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돌아오는 월요일 10시 반 OOO의 런던 사무소였다. 구글 맵을 열어 도착지의 우편번호를 넣고 예상 소요시간을 확인한다. 튜브(런던 지하철)를 타고 도착하여 걸어갈 동선도 확인해본다. 요사이 책상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진 나를 흘끔거리던 남편이 관심을 보인다. 나의 면접장소가 마침 그의 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영국에 락다운이 시행된 이래 2년여간을 줄곧 재택근무를 해오던 남편은 용케도 그 새 두 번 직장을 바꾸었다. 채용 시 모든 인터뷰는 화상 면접으로 진행되었다. 영국은 가끔 이렇게 참신하게 획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록다운 시 보리스 존슨이 발표한 방침은 이러했다. 직장으로 출근해야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집에서 근무할 것. 한국 회사에 소속되어 홍콩지사에 근무를 하던 시절, 한국계 회사의 방침은 이러했다. 홍콩 정부가 경고하는 강력하고 위험한 수준의 태풍이 오면 현지인들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지만, 주재원(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사무실에 와 있을 것.
런던도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교통시설에는 아직도 마스크를 쓰며 조심하는 분위기인데 이 회사는 대면 면접을 진행하는구나. 물론 한국인이라면 코로나가 세상을 집어삼키든 정부가 록다운을 시행하든 일자리를 구할 때 대면 면접을 하는 게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더구나 이곳은 공공기관에 준하는 곳이기 때문에 절차가 공정하고 투명하도록 애쓰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래도 영국인이랑 살면서 그가 2번의 이직을 하는 동안 대면면접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인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닌 애매한 사람이 되어 한국계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는 아침이다. 아침 8시 45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자마자, 하루 종일 어설프다가도 아침이면 로봇처럼 재빠른 남편이 얼른 나가자고 채근한다. 면접에 늦을까, 길을 잃을까, 더 나아가 이 일을 놓칠까, 혹은 자신이 실제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해주려고 하는 걸까, 함께 출근 하자는 것이다. 오늘을 위해 할인도 하지 않는 샵을 찾아가 코트와 바지를 사두었다. 면접 소식을 듣자마자 동네 채리티 샵(기부받은 다양한 제품을 되팔아 그 수익으로 힘든 이들을 돕는다)에 가 내 사이즈에 맞는 오피스룩들을 쭉 훑어본다. 보푸래기가 난 블라우스 몇 개가 눈에 들어오고, 그 옆에 벽에 기대 선 긴 거울에 비친 내가 보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옷이나 걸쳐도 빛나던 그때의 내가 아니다. 잠시 돈 좀 아끼겠다고 중고샵에서 맞지도 않는 사이즈와 영국 스타일의 화려한 컬러의 옷들로 얼기설기 센트럴파크의 비둘기 아줌마가 된 채로 면접을 갈 수는 없다. 문턱도 잘 넘지 않던 브랜드 샵을 들어선다. 할인도 하지 않는 멋진 정장 코트와 바지를 사며 지금 이 순간은 돈을 주고 자신감을 사도 된다고 토닥였다. 거금을 거침없이 결제하고 이 면접에 붙으면 또다시 구매하러 오겠노라 하며 나오는데 그 순간만은 결과에 상관없이 행복했다.
그렇게 돈을 주고 구매한 자신감의 코트와 바지를 입고 남편과 함께 전철을 탄다. 출근 시간 전철역,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꽉 찬 리프트 안에서 기분 좋은 떨림과 설렘이 느껴졌다. 매일매일 집에서 부대끼던 남편도 이렇게 보니 새롭고 귀엽다. 나도 다 아는 길을 마치 본인만 아는 양 최단 거리라며 이쪽저쪽으로 으쓱하며 안내하는 남편. 그 옛날 터널을 파던 기법을 따라 천장이 동그란 조그마한 런던 튜브를 타고 나도 흔들흔들 중심을 잡아본다.
대도시는 일하는 자들을 위한 곳이다. 도시 자체로 거대한 모던 팩토리, 현대적 공장, 오늘의 일터랄까. 사람들이 피가 되어 대동맥, 대정맥, 모세혈관 같은 전철, 지하철, 지상철, 기차, 택시, 버스, 우버를 타고 사방으로 빠르게 가로지르며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더 거대한 통신망이 거대 도시를 더 깊게 확장하고 있지만, 그것도 런던의 둥글고 자그마한 튜브 안에서는 검은 터널의 역사 속으로 잡아먹힌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2021년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흔들흔들 흐르고 이동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다음 이야기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