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리 Jan 22. 2022

갤러리에서 나온 여자

1. 네모에서 나오다

2022년, 런던의 한 골목길 오늘따라 뿌옇게 물안개가 낀 길 위로 감질맛 나는 비가 푸르르르 내린다. 무릎까지 오는 샛노란 레인 재킷과 다홍빛 벙거지 모자를 눌러 쓴 사람이 주름 하나 없는 크림색 팬츠에 진흙 한 방울도 묻지 않은 채 큼직한 황토색 군화 같은 신발을 신고 카페를 들어선다. 조금은 구부정한 듯한 모습으로 좌우로 훑어보더니 '커피 마실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카페에 와서 커피는 왜 물어볼까 하고 조금은 당황한 어린 직원이 침착하게 메뉴가 붙어 있는 뒤쪽의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네, 당연하죠. 여기 커피 메뉴들이 있어요.'라고 한다.


여자는 벙거지 모자에 가려진 시선을 들어 올려 메뉴를 확인하고는 가까운 빈자리 의자 위에 아슬아슬하게 주황 모자와 노란 재킷을 벗어 걸쳐놓는다. 줄줄이 적힌 커피 메뉴를 보고 더 당황한 그녀는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주문한다. 플랫 화이트. 그녀는 이름부터가 귀엽다고 생각한다. 납작한 하양이라. 털이 복실복실한 하얀 고양이가 그려져 있을까 하고 생각에 빠지다 레인재킷이 걸쳐있는 의자에 길고 날씬한 몸을 구겨 넣는다.   


큼지막하고 컬러풀한 옷을 벗으면 자유로운 예술인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예상을 깨고 보인 것은 막 빚은 도자기 같은 아기 얼굴에 맑고 깊은 녹색빛의 두 눈동자다. 그 눈을 마주하면 메두사를 본 듯 금방이라도 영혼을 빼앗길 것만 같은 예쁨 속에 놀라운 정적이 있었다.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는 카페에 앉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 아래 맛도 더럽게 없는 쓴 커피를 한입 맛보다가 정갈한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내려놓는다. 창가 너머로 발길을 재촉하며 걸어가는 길 위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둔탁한 레인부츠를 신은 채 길바닥에 고인 빗물이 튀어도 개의치 않는 무채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네모난 액자 속에 홀로 있다 보면 가끔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함께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경계가 확실한 것이 다행이면서도 외로웠다. 그녀는 이름 모를 다수의 호기심과 평가에서 벗어나 점점 젖어가는 이 도시의 그을린 듯 비릿한 듯 알 수 없이 상쾌한 공기의 향을 콧 속 깊이 들이마셨다. 갤러리에서 맡던 나무 냄새, 인위적인 방향제 냄새, 오일과 물감 냄새, 시간에 쩐 예술가의 한숨과 땀내가 아닌.  


그녀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 2022 1, 런던  갤러리의 그림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어떻게  발로 걷고 있는지, 어디로 가면 사람들을 구경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있을  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심지어 노란 레인 재킷의 큼지막한 주머니에는 골드 테가 둘러진 까만 플라스틱 카드도   들어있었다. 신용카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색이 다른 카드를 갤러리 리셉션에 놓인 작고 미끈하게 생긴 하얀 기계에 스치거나 데거나 하고는 그림이나 조각을 가지고 사라지곤 하였다. 매우 쓸모 있는 것에는 틀림없었다. 지금 그녀가 더럽게  커피 한잔 위에 놓인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먹을 때도 역시 사용했으니까.








...


(다음 편에 이어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전 11화 마흔의 면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