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직장이나 퇴근 후 회식자리는 매일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서로의 생각들을 털어놓는 자리일 것입니다. 상사와 함께하는 회식자리에서 ‘오늘은 편한 자리이니까 이 자리에서 만큼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맘껏 해도 좋다’는 말에 정신줄을 놓았다가 다음날부터 직장생활이 곤란해지는 신입의 실수도 있지만 수십 년 회식자리 처세를 몸으로 체득한 노련한 사람으로서는 상사가 먼저 가고 없는 2차, 3차에서 감추어 두었던 진실들이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 뒷담화 속에 그 직장의 속살이 술이라는 치명적인 무장해제 묘약과 함께 다음날 고통스러운 숙취의 기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교도관들은 회식자리에서 어떤 말들을 쏟아낼까요? 대개는 여느 직장인들과 별반 다름없이 거침없는 뒷담화와 업무이야기가 주를 이룰 겁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교정시설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수용자, 일명 ‘문제수’는 빠지지 않고 되풀이되는 이야기입니다. 교도관에게 문제수 이야기가 관심이 초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자는 회식자리에서 수용자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말고 다른 유쾌한 이야기나 하자며 애써 외면하지만 그건 진실을 마주하기를 잠시 유예하는 것일 뿐 그런 그도 다음 날 출근하면 엄연한 힘든 현실과 마주하게 되니, 교도관이라면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테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언론에 매일 나오는 사건사고 소식이나 전국의 50여 개가 넘는 교정시설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사고를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현재 전국 교정시설에 수용된 약 55,000여 명의 수용자 중에서 어떤 사람이 특별히 ‘문제수’로 인식될까요? 사실 ‘문제수’라는 말은 각종 관규 위반을 하는 수용자 중에서도 그 정도가 특히 심한 수용자를 일컫는 속어입니다. 형집행법(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서 정식 명칭은 “관심대상 수용자”로 일정한 요건이 되면 지정이 되는데요. 이때 아직은 관심대상 수용자로 지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문제 행동을 일삼는 경계선상에 있는 수용자들을 포함하여 통칭하여 문제수라고 부릅니다. 문제수의 유형은 상습적 폭력 행사 및 소란·난동행위, 상습적 자살·자해 시도, 상습적 고소·고발·진정을 일삼는 행위가 주를 이룹니다. 행위가 일회성이 아닌 상습적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조현병이나 분노조절장애 등 각종 정신질환이 위 행위와 결합되는 경우 수용관리는 말할 수 없이 힘들어집니다. 사회의 무법자가 흉악한 죄를 범하고 감옥에 들어와서도 반성은커녕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고 반복하여 또다시 감옥 안의 무법자가 되는 셈입니다.
혹자는 총이나 칼을 들고 덤비는 것도 아니고 사방이 전부 철문으로 꽉 막힌 감옥에서 문제수가 난동을 부려봤자 그거 하나 제압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도관의 고충은 물론 그런 난동을 제압하는 것도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그 후에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되는 문제행동에 대처하는 것에 있습니다. ‘어디 사는지 다 알고 있다, 출소 후에 두고 보자, 밤길 조심해라'같은 폭행, 협박은 다반사고, 만일 평소에 문제수와 마찰로 사이가 안 좋은 직원이라면 언제 어디서 어느 상황에 그에게 불의의 급습을 당할지 모른다는 긴장과 걱정 때문에 매일 교도소 커다단 철문 안으로 출근하는 것이 마치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는 가는 것처럼 느낄 겁니다. 저게 과연 사람의 모습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한 인간이 부릴 수 있는 가장 밑바닥 그 끝을 보여주며 끝없이 반복되는 문제적 행동에 대응하는 교도관의 일상의 삶들조차 멍들어 갑니다.
이해들 돕기 위해 문제수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폭행, 협박에 더하여 못, 볼펜스프링, 세제 등 각종 이물질을 집어삼키고, 더러운 화장실 오물을 뿌리고, 머리를 날려 벽이나 쇠창살에 처박거나, 손가락, 발가락, 아킬레스건을 절단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어 온몸에 자해를 하고, 자신의 거실 안에 물품을 모조리 뜯어내거나 깨부수며 밤낮으로 고함치며 소란 난동을 지속하여 다른 수용자의 일상생활을 방해하고, 교도관이 그의 행동을 제압하기 위해 규정에 따른 강제력 행사에도 적반하장 격으로 오히려 자신이 폭행을 당해 인권이 침해당했다며 청와대, 법무부, 국가인권위원회, 검찰, 경찰, 각종 언론사 등에 고소, 고발, 진정, 청원에 수십, 수백 건씩 막무가내로 정보공개 청구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저지른 죄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이 단지 수용생활을 편하게 할 요량으로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독립투사,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인권이 침해당했다느니 보장된 권리를 위해서라느니 터무니없는 억지에 아연실색할 따름입니다. 더 심각한 사례가 많지만 하드코어(hard-core )인 점을 감안해서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얼핏 교도소 사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수치상으로만 보면 교정시설 전체 수용인원의 1%도 채 안 되는 문제수가 뭐 그리 큰 문제가 되랴 싶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개울물을 흐린다는 말은 진실일 때가 많습니다. 어떠한 법적 제재나 처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날로 포악하고 교활해져 가는 문제수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반성은커녕 개차반 짖을 골라서 할지라도 감히 두들겨 팰 수도 없는 지금은 인권의 시대입니다.
우리에게는 ‘넬슨 만델라 규칙(Nelson Mandela Rules)’으로 잘 알려진 유엔(UN)에서 정한 ‘피구금자 처우에 관한 최저기준 규칙(Standard Minimum Rules for the Treatment of Prisoners)’이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는 각 나라의 형 집행에 대한 세계적인 표준규칙으로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합니다. 이 규칙이 강제성은 없는 권고사항이지만 우리 형집행법도 이러한 세계적인 인권 감각에 맞춰 그에 상응한 형집행이 되도록 많은 변화를 해왔고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선진화된 나라에서도 각 국가에 따라 범죄자에 대한 형의 집행은 천차만별입니다. 가령 중국, 러시아는 굉장히 엄정하고 일본의 감옥에서는 교도관이 지나가면 수용자는 제자리에 서서 얼굴을 숙이고 감히 교도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며 휴식시간 이외에는 침묵해야 하는 엄정한 분위기가 있고, 싱가포르는 조선시대 곤장처럼 일정한 범죄에 대해 매질을 하는 태형제도가 있는 등 엄격한 형 집행을 하는 국가가 있는 반면에 대체적으로 유럽의 교도소는 쾌적한 시설과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고, 남미의 교도소는 심심찮게 잦은 폭동과 화재로 많은 재소자와 교도관이 희생당하는 등 각 나라마다 제각각 다르게 운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문제수가 인권의 시대에 반사적 이익을 얻는다고 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우리의 형집행이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형벌로 퇴행하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각기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규정(rule)이 문제라면 규정을, 구조(Structure)가 문제라면 구조를, 의식(mind)이 문제라면 의식을 혁신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문제수도 궁극적으로는 교육교화와 심리치료적 관점에서 처우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상습적인 문제행동에 대한 실효성 있는 강력한 처벌과 합당한 처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문제수 자신에게나 교도관에게도 '양날의 검'(double edged-sword)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제수에 대한 현안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교도관의 수용자에 대한 교정교화 노력은 반쪽자리에 불과합니다. 교정교화와 수용질서 확립은 각자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상호 긴밀하게 중첩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정교화 없는 엄격한 수용질서 확립만 주장하는 것이나 엄정한 수용질서 확립 없이 교정교화만 주장하는 것은 양자 모두 현실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국민 일반의 법감정(法感情)에도 배치되는 것입니다. 양자를 모두 살리면서 궁극적으로 교정교화가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운용의 묘를 찾는 데 있습니다. 문제수에 대한 현안이 회피하거나 망각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럴수록 우리에게 끈덕지게 들러붙어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라는 것을 교도관이라면 잘 알고 있고, 전체 교정행정의 구도에서도 너무도 중요한 지점에 정확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들이 전체적인 문제를 부분적인 문제로 돌리거나,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을 반복하지 않고 사유의 지평을 넓혀가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문제수의 문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니까요.
시대가 바뀌어 아무리 인권이 향상되어도 감옥은 죄지은 자에 대한 복수를 하는 공간임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복수가 복수 그 자체로만 끝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교도관은 비단 문제수뿐만 아니라 일반 수용자에 대해서 자유를 억제하는 처벌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수용자 자신이 진정한 반성과 세상에서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상호 모순된 양가감정(兩價感情, ambivalence)에 대해 감정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사는 직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용자를 보는 시각이 자칫 잘못하면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의 극단적인 한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고, 이것은 분명 수용자뿐만 아니라 교도관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문제수에 대한 대안 모색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악의(惡意)가 아니라 편향된 처우에서 균형 잡힌 처우로 환원시킨다는 차원으로 이해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흉악범의 검거 소식에 대한 뜨거운 관심도 어느덧 시간이 흐르면 점점 기억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감옥이라는 지층에 켜켜이 화석처럼 퇴적되고 마는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교도관은 망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퇴적된 기억의 지층을 한 겹 한 겹 파내려 가는 고고학자와 비슷합니다. 그 과정은 쉽게 부스러질 수밖에 없는 예민한 감정의 풍화작용을 건드려야 하므로 지난(至難)한 균형감각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문제수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흔히 교도관들 사이에서 농담조로 ‘문제수는 교도관이 만든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인 것 같습니다. 문제수와 대척점에 선 교도관이 세상에 '없는' 문제수를 만든다는 측면에서는 틀린 말인 반면에 지금 여기 '있는' 문제수를 미해결 상태로 둔다는 측면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