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이 본 영화 (1)

# 관상

by 키다리 아빠

어느 날 파도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외딴 바닷가 초막으로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행색의 사람이 한 남자를 찾아옵니다.




“ 좋소. 바다 냄새 하며. 참 좋은 곳이오.
하나 이런 곳은 사내가 세상을 다 품고 난 후에 늘그막에나 내려와 쉬는 곳 아니겠소?
선생 같은 사람이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나는 좀 갑갑 소.
거사를 일으킨 자들의 면면을 낱낱이 보았을 터인데, 그 관상을 기록해 두었소?
기록하시오. 난을 즐기는 자들의 특징을 상세히 기록해두면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할 수 있지 않겠소? ”


그러자 그는 회한에 젖은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갑니다.



“그 날 당신들 얼굴에 뭐 별난 거라도 있었던 줄 아시오?
염치없는 사기꾼상도 있고, 피 보기를 쉬이 여기는 백정의 상도 있고,
글 읽는 선비의 상도 있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얼굴들이었소.
그냥 수양은 왕이 될 사람이었단 말이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당신들은 그저 높은 파도를 탔을 뿐이오
우리는 그저 낮게 쓸려가는 중이었소만
뭐 언젠간 오를 날이 있지 않겠소
높이 오른 파도가 언젠간 부서지듯이 말이오 “



영화 ‘관상’의 엔딩 부분입니다.

조선의 천재 관상가로서 김종서의 편에서 그를 도왔다는 이유로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인 사랑하는 아들이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후, 세월이 흘러 세상을 등진 채 외딴 바닷가 초막에서 회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당사자인 조선의 거대 권력자이자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가 다시 그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찾아와서 회유하는 장면의 대사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그도 다시 또 다른 세력에 의해 제거당할 두려움이 있으니 그를 다시 찾아온 이유일 겁니다.


‘관상’은 조선 전기 수양대군이 조카인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거기에 관상(觀相)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미하여 거대 권력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지는 천재 관상가 김내경(송강호 역)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권력에 대한 불안과 욕망의 심리가 관상이라는 다소 모호한 예측 시스템 안에 매몰되어 인간군상들의 비명이 뒤엉켜 점멸하는 모습과 그 답답한 시스템 안에서 밖으로 밀고 나오려는 거센 폭풍 같은 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이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운명을 예측하는 관상이라는 분야가 신라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해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가장 활발하게 유행하며 관상학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고대의 거북이 등껍질을 보고 길흉화복을 예언한다든지 음양오행에 입각한 사주팔자나 각종 점술 유행 등은 21세기 최첨단 5G 시대인 현대에도 현대인의 의식, 무의식 속에 폭넓으면서도 심층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형식과 내용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 관상을 포함한 이 모두는 본질적으로는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현재 기상예보를 슈퍼컴퓨터에 의존하는 것이나 각종 지표로 예측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심리적 맥락인 것이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욕망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대 원시인과 현대인의 심리적 기제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불안한 미래를 흘러간 과거의 축적된 경험으로 예측하는 시스템에 의존하다는 점에서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관상’은 당대의 사뭇 정교한 시스템으로 간주된 관상으로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안에 통제하려는 자와 시스템에 의해 통제당하는 자. 여기에서 불안과 욕망, 시스템에 의한 통제는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불안과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시스템을 제거하여 불안과 욕망을 자유롭게 둘 수는 없는 것일까요?




교도관으로서 영화 ‘관상’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영화 속 주인공 관상가 김내경과 이탈리아 출신의 범죄 인류학의 창시자 '체자레 롬브로조'(Cesare Lombroso,1835~1909)는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앞날을 예측하는 김내경과 사람의 신체 특징을 보고 장래의 범죄인을 예측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롬브로조는 ‘범죄학’(criminology)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여 범죄학의 창시자로 불려지며, ‘범죄인론’(L’uomo delinquente)를 완성하였는데요. 그는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범죄성이 유전적 형질에서 발현되고, 범죄자들이 생물학적으로 열성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범죄인이 다양한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비 범죄인과 구분할 수 있으며, 범죄인이 원시적이거나 불완전한 인간형으로 수준 낮은 영장류의 초기 인류를 연상하게 하는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범죄인, 정신이상자, 정상인을 대상으로 검시와 인체계측을 하여 생래적 범죄인은 해부학적으로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경사진 이마, 비정상적인 크기의 귀, 비대칭 얼굴, 앞으로 돌출된 턱, 평균 이상으로 긴 팔, 두개골의 비대칭 등 신체적 특징에 수반하여 고통에 대한 무감각, 도덕의식의 결여, 무감각한 양심, 과대망상, 충동적 행동, 복수심, 잔임 함 같은 성격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주장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도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전히 자기 안에 그려진 인상으로 범죄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확증편향은 조선시대 관상가가 관상을 볼 때도 그러했고, 지금 교도관이 재소자를 평가할 때도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곤 합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예측할 수 있는 것만 예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예측불허인 셈인 거죠. 그리고 예측한 것도 미리 전제된 범위 안에서의 예측일 뿐입니다. 불교적 사유로 보면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없으므로 다가올 미래는 없습니다. 결국 시간이란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고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처럼 모든 것들의 불안과 욕망이 꿈틀대는 예측불허의 정글입니다. 결국 ‘지금 여기’는 생각의 개입이 없는 생각 이전의 세상이면서 예측이 아니라 불안과 욕망 속에 바로 직면하는 피투(Geworfenheit, 彼投)하는 세상이며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불안과 욕망은 순수한 자신과 직면하는 새로움으로 가득 찬 기투(Entwurf, 企投)하는 세상입니다. 나는 결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면서(피투), 그러므로 동시에 다른 무엇도 개입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존재입니다(기투).




우리들은 불안과 욕망에 잠식되어 무엇인가 대상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야 안심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나를 대신 살아주는 것이므로 내가 아바타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관상이라는 대상에 종속되어 관상대로 살아가는 것으로써 고정된 틀인 관상을 깨부수고 뛰쳐나와 관상 밖의 순수한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고자 합니다.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위해서 일 겁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답답합니다. 그건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는 몸의 신호입니다. 자신의 몸의 신호에 민감해야 합니다. 언어에도 갇히지 않고, 개념에도 갇히지 않고, 세상 그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이 편에도 속하지 않고 저 편에도 속하지 않고 스스로 당당히 걸어 나와 날카로운 칼날의 경계에 설 수 있는 용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일 겁입니다. F.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그 용기처럼 말입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험난한 굴곡을 다 겪고 난 후 자연으로 돌아가 마음의 고요 속에서 관상가 김내경이 마침내 발견한 것은 아마도 세상에 미리 정해진 관상도, 운명도 없다는 깨달음은 아니었을까요? 과거에도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바로 지금 여기 현재를 살아가는 것. 세상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 어떠한 개념에도 고착되지 않고 무엇으로도 개념 지울 수 없는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관상 없는 관상, 운명 없는 운명을 진정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관상가 김내경도 그리고 우리들도 진정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보았기를 희망합니다.





교도관 생활 오래 하다 보니 대통령 관상, 범죄인 관상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상(相)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어떤 상이든 뭐가 문제가 될까요? 자신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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