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by 키다리 아빠

요즈음 연일 언론매체에서는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도 유명한 화성 연쇄살인사건 실제 범인이 무려 사건 발생 33년 만에 교도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져 전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교도소에서 25년 가까이 무기수로 살면서 1급 모범수로 생활하며 혹시나 가석방으로 출소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니 만일에 하나라도 출소했을 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합니다.


오늘도 아침에 출근하여 70여 명의 무기수가 다른 수형자들과 섞여 정해진 작업장으로 1열로 줄지어 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봅니다. 이들 무기수들도 화성 연쇄살인범 못지않은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얼굴 어디에도 그때의 악마 같은 흉측함이나 잔혹성을 찾아볼 수 없이 그저 평온하고 모범적인 수용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진심으로 지은 죄를 참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사람 마음은 모를 일입니다. 그들이 페르소나(persona) 속에 숨어 있는 한 그 자신만이 알거나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자기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잘 알 거라고 착각하는 우리 자신을 가장 잘 모르는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푸른 수의(囚衣)의 행렬들이 하나 둘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들은 원래 악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으로 변해간 것인지 또 아니면 선과 악이 혼재된 것인지 둘 다도 아닌 다른 무엇인지 혼란한 질문의 연속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선악의 문제는 빠질 수 없는 주제였을 텐데요.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악마를 보았다고 하니 이들은 진짜 악마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입니다.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량학살 핵심 책임자인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종전 후 도피해서 정착하여 살고 있던 아르헨티나에서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는 것에 참여하여 기록한 보고서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3)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전개하였는데요. 이 보고서가 나오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 자신도 유대인 출신인 아렌트에 대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자 아이히만에 대해 악마나 괴물이란 표현도 부족한 판에 ‘악이 평범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라는 특별한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그를 악마나 괴물로 규정하고 나면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의 정신병자 문제 정도로 끝나 게 되어 어쩌면 형사적인 처벌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그가 속한 어떤 구조나 시스템의 문제로 본다면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나 그 핵심 참모 역할을 수행한 소수의 책임으로 국한되고 평범한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은 엄혹한 나치시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인 아이히만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관여했던 사태를 두고 그를 악마나 괴물로 보거나 그가 속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요. 바로 여기에서 나온 생각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악의 평범성’은 악에 대해 흉악한 악마나 괴물로서 바라보는 기존의 사유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행동에서 어떤 사악한 동기나 누구를 죽일 어떠한 의도, 강압에 못 이겨한 것이거나 더구나 무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를 뿌리가 존재하지 않는, 깊은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는 행위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악의 절대성'이 아닌 ‘악의 평범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의 양심에 대해 그는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그들 가운데 한 명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 정상일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끝으로,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들은 후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성직자는 아이히만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해 주었다. 이 영혼의 희극 뒤로 전문가들은 그의 경우가 법적인 이상 상태는 물론 도덕적인 이상 상태도 아니라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내놓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경우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나, 열광적인 반유대주의나 세뇌교육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침내 그에게서 말하기의 무능, 생각하기의 무능,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으로 대변되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악의 평범성을 징표 하는 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잠에서 깨어나 끝없이 움직입니다. 각자 꿈을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세상에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입니다. 아이히만이 자신을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는 악의 문제를 사회구조적 문제나 악마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고 악을 행한 인간 자체의 소통과 사유의 무능함에 책임을 물음으로써 과거 나치에 대한 반성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사유의 무능과 타인의 삶에 대한 무관심이 마음에 자리 잡는 순간 우리 안에 감추어진 아이히만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경고를 넘어 엄연히 지금 우리에게 반복되는 현실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나치에 의해 박해받던 유대인, 그 이스라엘이 지금 팔레스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아 레바논이여!
팔레스타인이여!
홀로 화염 속에 떨고 있는 너
국경과 종교와 인종을 넘어
피에 젖은 그대 곁에
지금 나 여기 서 있다
지금 나 거기 서 있다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




아이히만 이후에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제노사이드(Genocide)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는 제주 4.3 사건, 6. 25,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베트남 양민 학살, 5.18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광주시민 학살, 그리고 비극적인 세월호 사건에서 국민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공복들의 행위를 목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이히만의 경우처럼 국가의 공무원들이 관여된 사건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어리석지 않았고 오히려 유능하고 성실하였으며 그야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작 그들에게 문제는 역설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믿었던 그 신념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에 일체 신경 끄고 내일만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다짐하면서 조직이나 사회 안에서 생각을 멈추고 기계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 사유나 판단의 작용 없이도 체제 내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렌트는 우리 스스로가 최선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신념들로 가득 찬 사람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사유, 생각 없음은 달리 말하면 자신과 타자의 관계성에 진실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이 가능한 것은 타자의 삶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어떤 특정한 개별적 방식으로 한정적으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체가 모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소하게 보이는 주변의 다른 삶들에 대한 무관심이 자신의 삶의 충실이 아니라 삶의 폐쇄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사유'는 오직 자신에게 올인하는 삶 속에서 다른 곳에 마음 줄 틈이 없는 '무관심'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우리는 흔히 ‘영혼 없는 공무원’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정권이든 상관하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으니 나는 문제없다’는 식의 논리로 정치적 중립성을 옹호하는 의식구조를 두고 한 말 일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읽히는 정치적 중립성 뒤에 숨고, 법과 제도 뒤에 숨어 위에서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공무원이 바로 순전한 무사유의 전형이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어떤 정권의 당략에 구애받지 않고, 더더욱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으며, 항상 국민을 마음 한가운데에 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명확히 인식하려는 날 선 문제의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종교라는, 이념이라는, 명분이라는, 능률과 효율이라는 화려한 레토릭 앞에 비판 없는 맹목이 가져온 대가가 지금 우리의 업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그 일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보다 자신과 일이 싸우고 있는 현장을 한번 멀리 떨어져서 여행자의 시선으로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평행선을 미친 듯이 폭주하는 욕망의 기관차를 멈추고 산 위에서 아득한 산 아래를 무심히 바라보듯 나와 타자를 모두 그곳에 내려놓고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생각의 무수한 파편이 아니라 생각의 고양된 방향성에 있습니다. 그 방향성은 모든 것 에로 향하는 방향성입니다. 그러니 생각 없이 살면,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방향대로 실존하는 삶이 아니라 타인의 바람대로 표류하며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말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는 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화성 연쇄살인범은, 이 곳 70여 명의 무기수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keyword
이전 02화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