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아이의 엄마 아빠의 행복한 표정이, 엄마 아빠와 교감하며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발 디디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는 아이의 미래가 그려집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커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로 이해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이 온당하다면 그 작은 아이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지 못하는 만큼 그 마음속에는 서서히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겠지요. 외로움, 눈물, 웃지 않음, 두려움, 분노, 공격성, 회피, 은둔 등등 말입니다. 그러다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마음속 깊이 쌓아두었던 그러한 감정들은 어떤 계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들과 어떤 계기의 잘못된 만남.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감옥의 존재는 이러한 것들의 결과물은 아닐까요? 감옥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나온 삶의 궤적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유년기의 슬픈 기억의 파편들이 덜 마른 수채화의 종이 위에 배어 나오는 물감의 촉감처럼 현재까지도 선명하게 살아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교도관을 범죄인에 대한 재범방지와 교정교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이러한 목표를 위해 수많은 방법론이 그 뒤를 따르고 있지만 거창하고 어려운 것을 떠나서 이 모두를 하나로 쉽게 표현하자면 ‘사랑의 싹 틔우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범죄인의 마음속에 사랑을 심어 그 싹을 틔우는 일. 그 어린싹이 자라 지친 나그네가 쉬어갈 수 있게 그늘을 내어주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되고, 작은 새들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될 테니까요.
농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농작물의 싹을 틔우는 작업이 얼마나 지극정성을 들여야 하는지를. 온도와 습도의 예민한 밸런스가 조금만 틀어져도 싹을 틔우지도 못하거나 싹이 나왔더라도 이내 고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사람 그것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온 사람의 마음에 사랑의 싹을 틔운다는 것은 정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싹을 틔우는 방향이 아닌 모든 노력은 결과적으로 교정행정의 본질에서 동떨어진 건조한 제도의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성이, 인문이, 사랑이 일방적인 주입으로 가능하지 않듯 소통 없는 일방적 교육은 재소자가 교육당하는 것 이외에 무슨 의미를 둘 수 있을까요?
요즘 어느 직장이나 소통을 강조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상사가 ‘오늘부터 소통합시다’라고 하면 소통이 되는 것인가요? 말로는 소통하자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권위에 절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기에는 상사 자신만의 착각에 빠진 불통의 소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 이제부터 소통합시다’라고 해서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 이제부터 사랑합시다’라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소통을 하려면 진정으로 소통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고, 사랑을 하려면 진정으로 사랑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책으로 배운 사람은 책만큼의 사랑밖에는 상대에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틀 안에 갇힌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모두 사랑입니다. 그것은 절대 꾸며서는 나올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어릴 때 보았던 이솝우화에 추운 겨울에 길을 가는 나그네의 두꺼운 외투를 누가 벗길 수 있는지 바람과 해님이 서로 내기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님과 나그네의 말없는 잔잔한 교감이 두꺼운 외투를, 두꺼운 벽을, 두꺼운 편견을 벗어던지라고 말합니다. 어떠한 강제도, 억지도, 인위적 노력도 아닌 그냥 자연스러움의 발로. 새싹이 햇빛을 받아 그 방향으로 이끌리는 스스로 그러함.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교도관으로 삼사십 년을 근무한 선배들의 정년 퇴임사 중에 ‘단 한 명의 범죄자라도 교정교화를 시킨 교도관은 그래도 성공한 교도관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의 무게가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슬픈 명제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도 다른 사람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는 사랑의 싹 틔우기로 증명될 수 있다는 희망이 교도관 각자에게 여전히 열려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