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에 대하여

by 키다리 아빠

우리는 날마다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그 바라봄이 밖을 향하든 안을 향하든 바라본다는 것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있습니다. 바라보는 자신이 여기 있는 만큼 그 대상을 저 멀리 전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같은 바라봄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사뭇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그 바라보는 거리가 한없이 가까워져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바라봄이고,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그 거리가 한없이 멀어져 아예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바라봄입니다. 마치 ‘만나서 괴롭다. 못 만나서 그립다.’처럼 말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이러한 양가의 감정 상황들이 늘 놓여 있습니다. 대개는 일방적인 하나의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증오가 상호 교차하며 부유하다가 다시 사라짐을 반복하며....
하지만 우리 삶의 공간 어디에는 불행하게도 증오라는 일방적인 하나의 고정된 감정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가 낙인을 찍은 규격화된 증오로 대상을 바라보며 결국 바라보는 자신까지도 그 낙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교도관’은 바로 그런 낙인의 위험을 매 순간 직면하며 사는 사람들 일 것입니다.




교도관은 본질적으로 범죄인을 바라보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입니다. 경찰관도, 검사도, 판사도 범죄인을 바라보는 직업이지만, 교도관은 범죄인을 아주 긴 호흡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범죄인을 한 순간도 시선 내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 일이니 만큼 그 바라봄은 애초에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바라봄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도소라는 인생 막장에 떨어져 지옥문에 들어온 범죄자를 평생 바라보고 산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잠깐만 바라보는 것도 불쾌한 경험을 평생 지속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불쾌를 넘어 고역에 가까울 것입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추격자’ ‘악마를 보았다’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잔상이 오래가는데 그 주인공들을 평생 앞에 두고 바라본다는 것은 ‘만나서 괴로운’ 교도관으로서 직업적 숙명이기도 합니다.


물론 교도관에게 교도소에 수용된 범죄인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물리적 활동을 하는 것은 사회의 안녕을 위한 당연하고 중요한 일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교도관의 바라봄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간 바라봄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교도소의 상징인 높이 둘러 쌓인 담을 경계로 자유와 부자유가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탈출하지 못하는 자신을 답답해하듯이 자신의 사유의 한계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실상 이 세상의 모든 감옥은 본질적으로 정신의 감옥일 것입니다.


교도관은 매일 이 정신의 감옥으로 출근합니다. 아니 이 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리고 사유의 한계를 안고 사회라는 다른 감옥으로 매일 퇴근합니다. 재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의 감옥에 투옥되어 형기를 마치면 사회라는 다른 감옥으로 출소합니다. 사유의 한계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말이지요. 교도관과 범죄인뿐일까요? 우리들도 매일 그러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요? 교도소의 높은 담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걸어 나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재소자 스스로가 그의 정신의 한계를 뚫고 나오도록 하는 것이 교도관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한 사람의 진정 자유로운 인간으로 스스로 서게 만드는 것. 교도관의 바라봄이 도달하는 궁극의 지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워낙 계량화 된 것에 익숙하고 좋아하지만 계량화는 측정할 수 있는 것만 측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나머지는 모두 미지의 세계로 남겨 놓은 채로. 측정할 수 없는 것도 측정할 수 있다면서 억지로 측정하는 것에는 헛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모든 것에는 인풋과 아웃풋이 있고 피드백을 하면 더 좋은 측정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과연 그런 확신을 지금도 신뢰하고 있나요? 혹시 내 연봉이 얼마이고, 내 집이 몇 평이고, 내 차가 무엇이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가요? 부분의 합이 전체라는 말을 믿는가요? 자신의 신체의 각 부분을 다 모으면 자신이 되는가요? 자신의 정신의 각 부분을 다 모으면 정말 자신이 될 수 있는가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미리 전제된, 측정 가능한 것만이 측정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측정된 것 안에는 미리 전제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것이 더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중에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들이 낡은 인식의 프레임에 벗어나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은 교도관이 바라봄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사유의 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교도관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인도, 피해자도, 우리들도 바라봅니다. 영원한 타자인 것처럼.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처럼. 영원히 화해가 불가능할 것처럼. 하지만 반대편으로 멀어진 대상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우리들의 투영(投影)이기도 합니다. 흔히 이 세상에 풀 한 포기만큼의 더할 나위 없는 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풀꽃 하나를 피우기 위해서도 온 우주가 합심하여 움직여야 하는데 ‘사람 풀꽃’은 더 말해 무엇할까요?


오늘도 교도관은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말의 추상(抽象)에 머무는 사변적 바라봄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사유의 치열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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