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권력, 피로사회

by 키다리 아빠

교정시설 안 수용자를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하다 보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반성하지 않고 안에서 조차 폭행, 협박 등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수용자를 어떻게 처우해야 하는지도 문제이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교정시설의 규칙에 너무 순응을 잘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규칙을 잘 따르는 사람이 무슨 문제가 될까 이상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수용자 중에 출소 후 사회적응에 곤란을 겪으며 우울증 등 각종 정신적 문제로 급기야 자살로 이어지거나 그러한 정신질환이 원인이 되어 재범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너무 안 지켜도 문제이고 규칙을 너무 잘 지켜도 문제이니 정말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교정기관의 규칙이나 지시를 준수하는 의미의 ‘순응’(順應)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응에는 자신의 범죄를 스스로 반성하며 교정시설 안에서는 물론 출소 후에도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잘 살아가겠다는 의미의 순응이 있고, 그다음으로 범죄에 대한 자기반성이나 출소 후 잘 살아가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가석방 등 조기 석방이나 안에서 각종 혜택을 받기 위한 의미의 순응과 마지막으로 규칙 준수가 범죄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정시설의 규율에 장기간 복종하다 보니 규율 자체에 몸이 길들여져 무의식적으로 순응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수많은 유형의 수용자들 속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교도관이라 해도 위에서 설명한 각각의 ‘순응’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속을 잘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은 교도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사람 마음속이라는 것을 매일 실감하며 살아가죠. 교도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점점 시간이 오래되어 갈수록 결국 교정교화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귀결되며, 교정교화의 한계가 곧 마음의 한계라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결국 그 마음이 시작되어서 여기 어둠의 감옥까지 오게 된 것이니까요.




여기에서는 앞에서 제시한 순응의 형태 중에서 ‘규율 자체에 몸이 길들여진 순응’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M.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규율에 길들여짐으로써 이것들이 신체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작용하는 통제 메커니즘을 ‘생체권력’(Biopower)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쉽게 말해 직장의 통제 메커니즘이 그곳을 벗어나도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작동되어 직장인들이 휴일에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고 답답하고 피곤함이 늘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40여 년을 감옥에 있다가 노인이 되어 가석방으로 사회로 나온 레드(모건 프리먼)는 마켓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주인은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감옥에 있을 때 교도관의 허락을 받아야 화장실에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화장실을 갈 때는 자기도 모르게 마켓 주인의 허락을 받고 가기를 반복하는 장면에서 "40년 동안 허락을 받고 오줌을 누러 갔다. 허락을 안 받으면 한 방울도 안 나온다."라는 독백은 ‘생체권력’(Biopower)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 Muedigkeitsgesellschaft』라는 책에서 푸코가 규율권력 · 통제권력에 자유가 억압 내지 통제되면서 나타나는 정신질환을 설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현대 성과사회에서는 자유로운 자기 스스로가 자기 파괴를 하는 정신질환이 있음을 ‘긍정성의 과잉’으로 설명하면서 푸코의 ‘생체권력’을 넘어 우리들을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피로사회』의 첫 문장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근대 서양 사회가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에서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전환하면서 과거의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 인간이 복종적 주체로서 타자 착취의 관계에서 오늘날은 성과사회, 성과주체로서 자기착취로 대체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우울증 등 각종 신경성 질환의 기저에 ‘긍정성의 과잉’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적 자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끝없이 착취하다 결국에는 소진(번아웃)되고 마는데, 우울증을 성과사회의 대표적 질병으로 선언하면서 성과사회 속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며 가쁜 숨을 헐떡이며 쉬지 않고 달리는 욕망의 기관차를 멈추기 위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풀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한병철, 피로사회>


푸코가 이질적, 타자적인 것의 부정적인 것에 대한 면역반응으로써 생체권력을 주장하는데 반해 한병철은 동질적인 자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면역반응이 일어나지 않고 무작정 받아들이기만 하다 나중에는 소진(번 아웃)되고 마는 현상에 대해 기존의 철학적, 심리적 이론적 토대를 하나하나 반박해 나아갑니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G.프로이트 심리학을 들 수 있는데요. 프로이트는 자아를 규율적 주체로 규정하고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강제적인 심리 장치는 오직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토대로 조직되어 있는 억압적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인데 반해,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에서는 자아가 부정할 일이 거의 없는 긍정의 주체로 규정되며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금지와 억압의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로서 우리는 오래전에 그런 사회를 떠난 것이라고 선언하며 만약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면 후기 근대적 성과주체에게는 더 이상 무의식이 없다고 까지 말합니다.


성과사회의 대표적 정신질환인 우울증에 관해서는 무형적이며 후기 근대의 자아는 성격이 없다고 하면서 성격 없는 인간을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무형성 내지 유연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것이 결국 끝없는 자기착취로 자신을 소진(burnout) 하게 만드는 성과사회를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고 말합니다.

“ 소진(burnout)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 <한병철, 피로사회>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하면 된다'는 구호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구조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성장이냐 분배냐라는 거대담론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기도 한 '하면 된다'는 자기 스스로 자유의지를 통한 행동의 변화라기보다는 군사독재정부가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명령을 하달하면 그에 상응하는 목표물을 산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체주의적인 정치선전 문구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하면 된다'라는 프로파간다가 개인의 내면 속에서 자기 긍정으로 전이되어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단기간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끝없는 자기 긍정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번 아웃되어 잘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었고, 이것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2003년 이후 15년째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지표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하면 된다'의 최신 버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의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에 대해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사유의 길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사방이 벽과 철창으로 가로막힌 갇힌 공간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감옥의 수용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공간이니만큼 육체와 정신 건강에 미치는 해로움이 당연히 클 것입니다. 교도관이 자살, 자해, 싸움 등 각종 교정사고를 예방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심리치료나 인성교육을 통한 교육교화가 소기의 성과를 못 내는 것은 강제적 구금과 자유 제한이라는 감옥이라는 본질적인 구조의 한계에서 오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두어야 할까요? 누구나 어디서나 한계상황은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도관도 수용자도 한계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에 있습니다. 직면한다는 것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마음을 넘어설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감옥으로 들어온 것도 마음이 들어오게 한 것이고, 이 감옥을 나가는 것도 마음이 나가야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부터 작은 희망은 시작될 것입니다. 결국 푸코도, 한병철도 생체권력을, 긍정성의 과잉을 우리들이 넘어야 할 한계상황으로 인식하였을 테니 말입니다.


지금 교정행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심리치료니 인성교육이니 하는 각종 교육교화 정책이 수용자나 교도관에게 앞서 언급한 '하면 된다'식의 표면적이고 반복적인 심리적 분발만을 요구한다면『쇼생크 탈출』의 레드는 고스란히 우리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따라 하는 ‘하는 것’보다 더 충실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다' '안 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왜(WHY)' 해야 하는지, '무엇을(WHAT)' 해야 하는지, '어떻게(HOW)' 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앞에 두고 해결의 실마리를 열어가기 위한 깊은 사유의 과정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앞세워 혹은 자신의 영달을 위한 작위적인 유위(有爲)는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해악이 될 뿐이라는 것은 오랜 경험들이 말해 주고 있듯이 노자(老子)의 무위(無爲)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함'이라는 패러독스의 행간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道常無爲而無不爲 (도는 영원히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노자, 도덕경>


기존 서구 심리학을 맹목적으로 수용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적 해석으로 그 틀을 과감히 깨고 나오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보면서 우리의 교정행정도, 교도관에게도 사고의 혁명을 기대해봅니다.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 서도철(황정민 역)은 경찰의 본분을 잃어가는 동료들을 향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명대사를 시전 하는데요. 우리 교도관에게 진정한 ‘가오’는 무엇인지 모두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교도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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