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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May 09. 2024

자유로운 파국

『연기 수업』과 예술로서의 워크숍


(아래는 2023년 12월 6일 《릿터》 45호에 수록되었던 원고를 거의 수정하지 않은 판본의 글이다.)







일원으로 참여해보기도 하고 진행을 맡기도 해본 입장에서, '왜 하필 워크숍일까?'라는 고민을 종종 하게 된다. 그 이름이 하도 번잡하게 쓰여 이젠 세미나나 강습이나 레크리에이션 같은 여타의 모임 형식들과 구분하기 어려워졌음에도, 사람들은 꾸준히 자신들의 모임을 워크숍이라 부르곤 한다. 특히 ‘문화적’인 목적으로 조직된 모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모임을 굳이 워크숍이라 호명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상상적인 위상이 있는 걸까? 아니면 반대로, 앞서 거론한 모임 형식들의 요소를 포괄하거나 교차시킬 수 있는 유동적인 형식이 바로 워크숍인 걸까? 당장 답을 내리긴 어렵지만, 하여튼 워크숍이 요즘 유용하게 통용되는 이름이란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면 그중에서 '문화적' 워크숍이라 할 만한 모임들은 보통 어떻게 진행되는가? 대강 정리해 보면 이렇다. 진행자와 기획자는 특정한 주제 혹은 목표를 설정하여 그에 따라 다수의 참여자들을 모집한다. 참여자들은 대개 해당 주제를 포괄하는 영역에 대한 아마추어들이다. 참여자들에겐 특정한 기간 동안 정해진 절차에 따라 주제 혹은 목표에 걸맞은 행동을 수행하기를 요구받는다. 진행자와 참여자는 그 수행에 따른 자신의 결과 혹은 결과를 위한 과정을 서로에게 노출하며 때론 거기에 간섭하거나 공모하기도 한다. 참여자들은 워크숍의 방향에 따라 각자의 결과를 내거나, 공동의 결과를 내거나, 혹은 아예 구체적인 결과를 내지 않고 끝을 낼 수도 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안개가 약간은 걷히는 듯하다. 워크숍이라는 이름의 범용성은 무엇보다 워크숍 내 행동에 있어 강제성과 자발성의 동등한 필요도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워크숍: 체험학습의 설계 및 활성화(Workshops: Designing and Facilitating Experiential Learning)』란 연구서에 따르면, 행동 학습 이론과 인지 학습 이론의 유행을 거치면서 교육학 안에선 지식 및 기술의 전수에 더해 다수의 피교육자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극까지 교육의 목표로 삼는 교육법이 요구되었고, 그 시도와 수정의 역사가 쌓인 결과로서 워크숍이 오늘날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고 한다. 즉 참여자에게 특정한 행동을 수행하도록 (최소한으로) 강제하는 동시에 참여자가 (최대한으로) 자발성을 발휘하여 그 행동을 자유로이 수행하도록 촉진할 수 있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이 워크숍의 기본적 이념인 게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워크숍을 굳이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직원들이 이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또 행동하고 있다고 ‘대타자’에게 알려야 하니 말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워크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업들이 꾸준히 나오는 건 아마 이런 이념 때문일 테다. 관계 미학의 시대가 한참 지났다고는 해도, 아마추어적이고 우연적이며, 유동적이고 ‘간격의 우정’이 감도는 잠깐의 공동체를 미학을 통해, 혹은 미학 안에서 조직해 보려는 열망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예술’의 가능성의 조건(Condition of Possibility)을 낱낱이 재고하고 해체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요즈음의 조류에서라면, 참여자 각각의 수행성을 극대화하려는 이념을 가진 워크숍은 당연히 적절한 형식일 수밖에 없다. 미술가들이 ‘작품’ 생산을 염두에 두지 않는 ‘파라큐레토리얼(paracuratorial)’한 워크숍을 기획하고, 미술관에서 나날이 이런저런 학술적 프로그램을 개최하는 건 이젠 정말 흔한 일이 되지 않았나?


[그림 1] 『연기 수업』의 한국어판 표지


당연하지만 워크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미적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우리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 박지영의 『고독사 워크숍』, 극단 고래의 〈우리〉 같은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본 기획의 다른 글들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참고로 나는 아직 못 읽어봤다) 오늘날의 미적 시도에 있어 (앤토니 홀의 박사논문의 제목을 빌리자면) ‘예술로서의 워크숍’(The Workshop as Art)을 승인하려는 의지는 분명 무시 못할 영향력과 추동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의 만화가 닉 드르나소가 근작 『연기 수업』에서 (일단 제목처럼 “연기 수업”이라 불리긴 하지만) 워크숍을 주요 소재로 끌어들인 것 자체는 딱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 아니다. 그의 전작 『사브리나』가 그래픽 노블로선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 우리가 이 작품을 주목하고 또 면밀히 읽어야 한다면, 그것은 드르나소가 ‘예술로서의 워크숍’을 달리 생각할 수 있을 설득력 있는 관점을 건조하고도 소름 끼치는 방식으로 제시하기 때문일 터이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10명의 사람들이 연기 수업에서 만난다. 그들 모두가 삶에 있어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 문제를 타개할 새로운 방향을 찾고 싶어 한다. 가령 한 부부는 그들의 삭막해진 관계를 새롭게 할 자극을 갈구하고, 한 여성은 자신의 3살 배기 아들의 뜻 모를 행동에 계속 불안을 느끼며, 한 남성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혐오 때문에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다. 존 스미스라는 교사는 “모두가 예외 없이 자기만의 고유한 무언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며 자기 이름 마냥 흔해 빠진 자기계발적 멘트로 수업을 시작한다. 그는 참여자들에게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하는 대신 참여자들의 연기를 대략적으로 설계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워크숍의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그런데 수업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참여자들은 상상치 못했던 다른 문제들을 겪게 된다. 그들은 일상을 유지할 통제력을 잃어가고, 그들이 연기하는 허구는 그들을 둘러싼 실재와 분간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다. 허구와 실재의 구분 불가능성이란 테제야 이젠 상식적인 이야기에 가깝고, 그중에서도 구분 불가능성이 연기를 통해 활성화된다는 전개는 식상하고 진부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연기 수업』을 논한 미국의 대다수의 평자들은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닉 드르나소의 영민함은 이런 식상하고 진부한 전개를 소화하는 데 있어 초점을 ‘주체가 겪는 혼란’이 아닌 ‘구분 불가능성의 형식’에 맞추는 데서 드러난다. 달리 말해, 『연기 수업』 속 연기 수업은 캐릭터들의 인식론적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장치이기 이전에 그런 인식론적 혼란이 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는지를 따져보기 위한 장치이다.



[그림 2]


『베벌리』, 『사브리나』, 그리고 이 『연기 수업』에 이르는 드르나소의 장편 만화들에서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각인되는 건, 역시 건조하며 모호하기 짝이 없는 특유의 화풍과 연출일 것이다. 3번째 수업이 끝난 이후인 130페이지에서 토머스가 인물화 수업용 누드 모델 일을 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걸어갈 때, 드르나소는 뜬금없이 토머스의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의 단독 프레임을 삽입한다([그림 2]). 그리고 토마스의 칸과 그 여성의 칸을 정면 바스트 숏(인물의 머리부터 가슴까지를 포착하는 숏)으로 번갈아 제시한다. 이후 이 여성 캐릭터는 단 한 번도 재등장하지 않는다. 그럼 이 장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두 사람이 우연히 눈을 마주친 걸까? 토머스가 이 여성에게 반한 걸까? 아니면 이젠 지나가는 아무개의 시선마저 그에겐 육중하게 느껴지는 걸까? 안 그래도 이리 불확실한 것을, 캐릭터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정적인 얼굴 데포르메는 더더욱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진행되는 사건에서 묘사될 수 있는 운동성과 표현성을 거의 ‘발라낸’ 엄정한 이미지들이 분절적으로 엮이면서, 캐릭터들은 종종 표정을 지닌 얼굴이 아니라 무늬를 지닌 머리통을 달고 사는 것 같고, 캐릭터들의 활동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만드는 유기적인 연쇄적 몸짓이 아니라 서로 상관없는 일러스트들의 묶음에 가까워진다. 내러티브 만화에서 가능한 ‘만화적’ 효과를 힘껏 억제하는 만화, 그래서 감각적이라고도 현상학적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더 코믹스 저널의 레인 예이츠가 말한 것처럼 “비상상적(non-imaginative)”이라 해야 옳을 만화. 적어도 지금까지 만화가로서 닉 드르나소의 궤적은 그런 만화를 만드는 쪽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연기 수업』은 ‘구분 불가능성의 형식’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림 3]


허구와 실재가 구분할 수 없어진다는 말은 『연기 수업』에선 좀 더 구체적으로 발음되어야 한다. 드르나소의 비상상성은 허구와 실재 양자를 똑같이 엄정한 이미지로써 배치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부부가 소개팅을 연기하는 첫 장면에선 연기의 전과 후가 일관된 연출로 그려지는 정도지만, 수업의 2회차에선 연기 중인 신(Scene)과 현실을 구분하던 각각의 공간적 배경이 어긋나고, 4회차에선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신의 시공간적 배경이 엄청나게 확장되고 복잡해지면서 진행 중인 사건이 허구일 경우 캐릭터들이 ‘실제로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가 불확실해지며, 162페이지에선 신을 연기하는 와중에 강당에 있던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나무집 세트가 난데없이 들어섰다 사라지기도 한다([그림 3]). 물론 연기에 극도로 몰입한 참여자들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주관적 풍경이라 ‘상식적으로’ 말하기는 쉽다. 하나 이런 기묘한 연출로 인한 우리의 당혹감이 그것만으로 해소될 리 있을까.


드르나소는 우리를 설득시킬 생각이 없다. 가령 〈파이트 클럽〉처럼 (만약 영화를 안 보셨다면 이 문장은 넘어가시라) 후반부에 주요 캐릭터가 실은 전적으로 허구의 인물이었다고 폭로하는 작품의 경우라면 그 폭로의 순간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보여주며 그전까지의 전개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기 마련이다. 그와 달리 『연기 수업』에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란 가정 자체가 무시되고 우스꽝스러워진다. 반복컨대, 인식론적 혼란이 독자인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닉 드르나소의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서사적 논리를 초과해 사건을 ‘일어나 버리게’하는 엄정한 이미지들, 곧 ‘구분 불가능성의 형식’. 사물을 더 자명하게 묘사할수록 이미지들은 더더욱 기괴해진다. 이때 허구와 실재는 사후적으로 뒤섞인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항상 뒤섞인 상태였던 게 드러난 걸까? 드르나소의 비상상적인 만화는 이런 언캐니한 질문으로 우리를 던져버린다.


한데 이렇게 ‘구분 불가능성의 형식’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자연스럽게 생략되는 지점이 있다. 대체 존이 무슨 짓을 했길래 참여자들이 이 정도로 허구와 실재를 혼동하는가? 적어도 직접 읽었던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존이 참여자들의 신에 종종 개입하기는 해도 마약이나 마법을 써 그들을 조종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인셉션〉이나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폭풍수면! 꿈꾸는 세계 대돌격〉처럼 참여자들이 같은 허구를 경험하도록 만드는 기계도 없다. 돌이켜보면 모든 참여자들이 파국을 상상하고 그리로 향하도록 존이 주도적으로 이끈 적도 없다. 게다가 3번째 수업에서 참여자들이 각각 자신만의 신을 상상할 때 존이 하는 일이라곤 오직 멍 때리기뿐이다! 이 수업이 실질적으로 워크숍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의미인 게다. 존이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도통 나올 생각이 없다.


증거가 나오질 않으니 스멀스멀 외설적인 상상이 피어오른다. “전 그저 모집하는 사람이에요. 마치 제가 운영자인 것처럼 얘기하시네요.”라는 존의 마지막 말이 만약 정말로 사실이라면? 수업의 참여자들이 존에게 마냥 속은 게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인식론적 혼란을 겪게 된 거라면? 존은 단지 그들이 바랐던 게 이루어지도록 판을 깔고 등을 밀어준 거라면? 그들에겐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공통의 열망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물증이 없다고 해도, 존이 무슨 짓을 어떤 식으로든 하긴 했고 이 사단에 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이 연기 수업의 ‘역량’을 믿고 싶어서 믿었으며, 그로 인해 이 같은 결과를 맞이한 게 아닐까? 이쯤에서 (전체주의 하의 인민은 무력과 광기가 아니라 논리에 의해 체제에 복종하게 된다고 말한) 한나 아렌트가 충동적으로 떠오르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니리라.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처음의 주제인 ‘예술로서의 워크숍’으로 돌아간다.


앞서 나는 워크숍의 기본적 이념을 “참여자가 (최대한으로) 자발성을 발휘하여 그 행동을 자유로이 수행하도록 촉진할 수 있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 연장선에서 ‘예술로서의 워크숍’은 참여자의 자발성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해, 미적 의미화를 넘어 미의 ‘물리적인’ 성립 자체가 아주 직접적인 수준에서 참여자에 달려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쭉 ‘수용자’란 말을 쓰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관객적 주체성’의 담론들과는 약간 다른 의미로, 참여자는 미적 시도의 기본 요소로서 처음부터 전제된다. 한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그런 미적 시도가 꼭 참여자의 자유를 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어떤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자유를 마음껏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도 최대한 자유롭기를 참여자들에게 독려하면서 말이다.


진행자로서 예술가가 (우연성과 유동성을 지닌) ‘자유로운 참여자’를 워크숍의 이상적 모델로 상정할 때, 가혹하게도 참여자들에게 있어 자유는 의무적인 것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자유로운 참여자’만이 유의미하다는 식의 사고, 작품/작업(Work)의 생산을 위해 참여자들의 자발성에 따른 일(Work)을 자원 삼아 투여하려는 프로세스가 무의식적 층위에서부터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이지 못하다면 그건 당신 탓이라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공동체에서 자유를 만끽하지 않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이러한 미적 시도들은 참여자들의 옆구리를 찌르며 잔인하게 속삭인다. 그 속에서 자유는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약이 아닌, 착취와 억압의 다른 모습이 된다. 이러한 경우들은 참여자들에게 예술의 생산에 참여했다는 의식 말고는 실상 ‘예술’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내주지 않는다. 10년 전에 미적 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흐름을 예술이 역수입하고 만 걸까? ‘예술로서의 워크숍’에 대한 나의, 그리고 드르나소의 우려는 바로 이 지점을 향하는 것이다.


즉 『연기 수업』에서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참여자들의 열망에 주어진 무제한적인 자유는 오히려 뒤틀린 책임감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이 된다. 혹은 거꾸로, 그런 자유를 독려하는 예술가인 존을 통해 드르나소는 ‘예술로서의 워크숍’의 유독한 판본이 어떤 섬뜩한 파국과 닮을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 점에서 『연기 수업』을 읽는 것은 오늘날의 ‘미학의 정치성’에 대한 예리한 관점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 하겠다. 어서 당신과 함께 이 만화를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한데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 하나 있다. 2023년 초에 번역 출간됐던 『연기 수업』은 지금 품절된 지 오래다. 즉 여러분은 당장 이 만화를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당황하지는 마시라.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분께서 이 글을 다 읽는 즉시 입소문을 퍼트리고 출판사에 연락을 넣어 보길 권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밀수를 위한 제안서이기도 하다. 어서 당신과 함께 이 만화를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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