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023 아르코 <작가조사-연구-비평>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차재민 작가 연구서 『1보다 크거나 작거나』에 한 꼭지를 맡아 「실험은 실패했습니까? - 현대의 시(청)각 주체와 차재민의 영상작업」이란 짧지 않은 작가론을 실었다. 요즘 한국에서 영상작업을 주 무대로 삼는 미술가들 중 (그 자신이 "나는 씨네필도 아니었고, 영화 촬영 문법에 익숙한 사람도 아니었고, 극영화를 찍고 싶은 사람도 아니"라고 역설한 것과 별개로) '영화'와 '미술' 양쪽에서 빠르게 지지를 얻고 있는 차재민의 작업 전반을 '기술'과 '실험'이란 키워드로 정리해본 글로, 차재민에 대한 기존의 독해틀 몇 가지를 간접적으로 기각하면서 차재민이 어떤 방식으로 현대의 시(청)각 주체라는 문제계에 대해 필요한 교정점을 제시하는 지 논해보았다. (여담으로, 채널예스의 <써야지 뭐 어떡해>에 실었던 칼럼 「우리에겐 의심이 필요하다」는 이 글의 프로토타입 내지는 선공개된 판본이다.) 원래 계속 흥미를 갖고서 차재민의 작업을 쫓아왔던 터라 처음 청탁이 왔을 때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수락했었는데, 한참 집필에 열중하던 때가 하필이면 어머니가 사경을 헤메기 시작하여 병간호에 열중하던 2023년 상반기라서, 내게는『악인의 서사』에 실었던 「악(당), 약동하는 모티프들」과 함께 가장 힘겹고 고통스럽게 쓴 글로 기억된다. 그만큼 글에 대해 애착이 적잖이 생기기도 하지만 말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런저런 조건으로 인해 원래 구상했던 분량과 기획에서 살짝 모자란 형태로 글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팝 팀 에픽> 애니메이션과 차재민 사이의 기묘한 '연대'를 다루지 못한 것, 또 형이상학의 계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한 것이 그러하다) 차재민의 작업이 지닌 유효성을 지적이나마 했다는 걸 그나마 위안 삼아야겠다. 귀한 지면과 기회를 주신 우아름 편집자/평론가님과 차재민 작가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큰 감사를 전한다. 당연하지만, 본 연구서에는 글에 대한 영역본이 같이 실려있다. 맨 아래는 본 연구서의 웹뷰어 페이지이다.
"(참으로 새삼스럽지만) 기계의 객관성이라는 ‘신화’는 알고리즘과 AI의 광풍 속에서 여전히, 혹은 나날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작금의 첨단정보기술은 그 편리함과 정확도로 말미암아 군사 활동이나 사고 보험처리를 넘어 공교육, 콘텐츠 제작, 그리고 일상의 놀이에서도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고 있어서, 편리함과 정확도가 객관성을 반드시 보증하지는 않지만 (대리보충의 방식으로) 그러한 ‘신화’를 덧붙이고 강화하는 데에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당신이 최근의 미디어 연구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봤다면 이 ‘신화’의 양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을 테다. 기술이 사심 없이 중립적이긴커녕 권력과 공조 관계에 놓여있고 또 활동한다는 반대급부의 인식 역시 세간에 (위세까지는 아니지만) 퍼지고 있지 않던가? 흑인을 범죄자로 치부하거나 아예 인간으로 분간하지 못하는 광학 기술, 군사기술과 맞닿아 있는 컴퓨터그래픽의 발전,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같은 글로벌 IT 대기업들의 정보 독점. 게다가 당대의 보편적인 AI 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못해 매번 사람 손을 거쳐야 구체화된 무언가를 출력한다는 건 또 어떤가?"
"차재민이 당대의 기술과 벌이는 대결은 이렇게 눈앞의 시각적 이미지를 의심하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래, 불신이 아닌 의심이다. 이렇게 쓴 것은 우리가 차재민의 영상작업을 보던 도중 작품 내적 논리에 의해 내용에서 완전히 튕겨 나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궁과 크로마키〉에서 어색함이 쉽사리 기각되지 않듯이, 온전히 수긍하지도 온전히 거부하지도 않는 유예의 상태에 우리는 머문다. 인간이 기계를 주관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얻은 표현 역시 (엄연한 실체로 제시되며 우리와 상관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존재론적 객관성을 가진다는 걸 차재민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문제다운 문제란, 당대의 기술을 통해 제작 및 제시된 표현이 우리에게 곧장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는 사실이리라. 이 사실은 어째서 문제가 되는가? 이를 설명하려면 먼저 시각적 이미지를 의심하게끔 만드는 것과 다른 방식을 취하는 그의 작업을 논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의 기술은 오직 시각적 이미지로써만 표현을 하지는 않으니."
"그렇다면 차재민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이젠 당신께서도 짐작하고 있으리라.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으로 대표되는 감각 내용-곧 정보가 아닌, 정보들 사이의 간격 자체에 대한 향유를 그는 관객에게 요구한다. 무엇을 위해? 당대의 기술과 대결하기 위해. 보다 정확히, “기계와 다른 객체들에 아웃 소싱된” 시각 경험을 영유하는 현대의 시(청)각 주체로서 우리의 능력을 재고하기 위해.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차재민은 기술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기술적 재현의 결과로서 표현이 허상에 불과하다거나 폭력적이라고만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표현은 모두 분명한 실체이되 항상 자연스럽고 자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딥페이크 기술이나 가짜 뉴스 같은 대안적 사실이 나날이 ‘사실적’으로 발전하거나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당대에 우리는 이런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표현도, 그것을 소화하는 감각도 몹시 고집스럽게 선택적이다. 차재민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모종의 실험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AI의 시대에는 예술가를 비롯한 ‘콘텐츠 제작자’들이 설 자리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쉽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쉽게’ 믿는 회사들이 일러스트레이터나 디자이너를 줄줄이 해고하며 그 시대를 앞당기려 애쓰고 있기도 하다. 하나 AI가 생산한 ‘콘텐츠’들이 인터넷을 순식간에 가득 채우면서 AI가 AI를 참조하기 시작한 요즈음에, 독자나 관객을 비롯한 ‘수용자’의 위상 역시 위협을 받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이는 물론 “우리가 기계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하지만 우리는 동의를 한 적이 없다.” 차재민에게는 이야말로 진정 우려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실험이 항상 실패하기를 바란다. 실패를 경험하고, 그 경험이 실패임을 인정하고, 실패 너머의 새로운 연대와 판단을 추구할 용기를 북돋기 위해. 만약 자신이 실험에 성공했다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보다 공포스러운 일은 얼마 없으리라. 차재민의 작업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