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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Apr 15. 2024

<트루먼 쇼>를 거론할 필요가 아직도 있다면


영화잡지 《프리즘오브 30호의 '스펙트럼' 섹션에  「<트루먼 쇼>(에 대한 독해)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실었다. 이번에 《프리즘오브》는 주제 영화로 <트루먼 쇼>를 선정했는데, 나는 그 안에서 (편집부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트루먼 쇼’가 일상이 된 사회 속 트루먼을 보는 우리”에 대해 쓸 것을 요청받았다. 늘 그렇듯 나는 이 요청을 내 식대로 약간 곡해해, '안과 밖'을 구분하는 사람들의 현실감각이 어떤 다른 양상으로 변했는지에 대해 <트루먼 쇼>를 구심점 삼아 짤막하게 논해보았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안과 밖'은 내가 오랫동안 문제시해 온 개념이기도 하다. 가령 곧 이북으로 재출시 예정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에 실린 에세이 「강박적 타자를 위한 스케치」가 그렇다) 하나 개인적으로는 (<써야지 뭐 어떡해>에 실은 일부 칼럼을 제외하곤) 얼기설기 설렁설렁 쓴 부끄럽고 형편없는 글이라 생각되어, 이 글이 발표되는  적잖이 민망하다. 아닌 게 아니라, 급한 일정으로 청탁이 와 부랴부랴 집필하느라 예전에 쓴 글들의 논의를 마구잡이로 다시 가져다 쓴 데다 논증의 구체성 역시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편집부 측과 의견 조율 과정에서 원고가 처음의 구상에서 꽤 많이 바뀐 것 역시 민망함에 한몫을 한다.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좀 더 증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트루먼 쇼»는 ‘트루먼 쇼’만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트루먼 쇼’를 성립시키는 두 가지 축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영화라 해야 옳다. 하나의 축은 물론 주인공인 트루먼인데,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바로 이 쇼의 출연진과 제작진이다. 생각해 보면 ‘트루먼 쇼’는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삐그덕대기 시작했다. 하늘에선 조명이 떨어지고, 해변에선 트루먼에게만 물줄기가 쏟아진다. 달리 말해 감독인 피터 위어는 트루먼이 ‘트루먼 쇼’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고 말해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어째서? ‘트루먼 쇼’는 어차피 영화의 러닝 타임 안에 끝날 쇼라서? 아니면 «트루먼 쇼»가 씨헤이븐이 가상의 세계라는 걸 대놓고 명시하는 영화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트루먼 쇼’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출연진과 제작진의 노고를 환기하려는 것이었다고 말이다."


"한데 그렇다면 이때 ‘트루먼 쇼’의 바깥은 대체 어디인가?«트루먼 쇼»의 바깥은 흔히들 생각하는 ‘바깥’이 아니다. 1990년대 말, «트루먼 쇼»와 짝패를 이루는 ‘철학적’ 영화로 여겨지던 «매트릭스»(1999)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 영화에서의 바깥은 세계의 또 다른 일부일 뿐, 우리가 따르던 규칙이 통하지 않는 (상징계 혹은 구조의) 바깥과 다르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 “다른 데는 뭐 하지? ‘TV 가이드’ 어딨어?”라는 질문이 역설하고 «매트릭스»의 “실재의 사막에 온 걸 환영한다”라는 환영사가 일러주듯, 여기서의 바깥은 세계의 또 다른 일부일 뿐인 것이다. 다만 훨씬 성마르고 거칠 뿐. 이 당시에 (상징계 혹은 구조의) 바깥은 이미 사회적인 무의식 속에서 유효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명되었던 게 아닐까. «트루먼 쇼»와 «매트릭스»의 주제 의식이 ‘연출된 세계가 아닌 스스로의 삶을 살라’는 것일 때, 그것은 곧 ‘바깥의 삶이 고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채 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안과 밖의 구분을 믿지 않고, 믿지 못한다고 해서 앞서 언급한 «트루먼 쇼»와 «매트릭스»의 ‘상식적’ 구도가 완전히 폐기된 것 또한 아니다. 현재의 안과 밖이라는 구도는 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스쳐가 ‘진정성’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데 이용된다. 때문에 그러한 진정성의 제스쳐들은 되려 유희거리가 되거나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진정성의 핵심에는 ‘안과 밖, 혹은 카메라의 앞과 뒤는 본래 다르지만, 이곳에서만은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다’라는 인식이 놓여 있다. 가령 ‘무한도전’ 이후의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 욕설이나 ‘안 웃기는 캐릭터’가 어떻게 어울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는 단지 «트루먼 쇼»처럼 ‘환상과 현실’의 구도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콘텐츠들에만 해당되는 진술은 아니다. «트루먼 쇼» 이후 ‘우리가 세계라고 믿었던 것이 그저 환상 중 하나일 수 있으며 그 바깥은 (실상) 없다’는 의식은 빠르게 통속화되었다. 그 결과 최근에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처럼 멀티버스 세계관을 직접 펼치(지만 결국 메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우주’를 부당하게 특권화하)는 경우, «굿 플레이스»(2016-2020), «어쩌다 발견한 하루»(2019), 『전지적 독자 시점』(2018- 2020)처럼 복수의 세계를 상정하되 바깥을 우위에 두지 않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들을 중첩시키려 하(지만 결국 중첩하는 행위 자체에서 소심하게 만족해버리)는 경우 등이 생겨났다. 미디어 생태계의 급진적인 발전으로 누구든 시청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퍼포머가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어떤 작품들은 그러한 시대적인 조건을 고스란히 극화하(기만 하)는 데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정말로 우리가 사는 세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까? 나는 적잖이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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