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저냥 ㅏ랑 Mar 20. 2024

오카자키 쿄코에 대해 너무 많이 쓴 것도 같지만


출판사 쪽프레스 홈페이지에 「핑크』 -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작년 10월에서 11월까지 나는 쪽프레스와 함께 만화 비평 모임 <오카자키의 뒷모습>을 기획 및 진행했었는데, 거기서 『핑크』(1989)를 소개할 때 쓴 발제문을 약간 수정해 여기 실은 것이다. (참고로, <오카자키의 뒷모습>의 멤버이자 나의 오랜 동료이기도 한 대중음악평론가 정구원 역시 함께 글을 실었다.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나는 여기에서 (성급하고 거친 분류법을 쓰자면) '만화가' 오카자키 쿄코보다는 '이야기꾼' 오카자키 쿄코에 대한 짧은 개론을 염두에 두어, 그가 파괴적이라 할 만큼 과격한 욕망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해 간략히 논해보았다. "욕망을 방어할 뚜렷한 근거를 대지 않으면서 그런 자발적인 욕망을 충실히 재현"하고 긍정하는 방식 말이다. 원래는 『헬터 스켈터』(2003)에 대한 발제문까지 함께 게재하려 했으나, 글의 경우는 논의할 영역의  너무 넓어 당장은 손을 없겠다 생각에 일단 미뤄두었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공개할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라... 참고로 이 글의 제목은, 본문에도 나와있듯 조지 손더스의 아름다운 강의록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발췌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 편집자님께서 붙이셨는데 썩 어울리는 것 같다. 아래는 글의 링크다.







"이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 저는 새삼스레 오카자키에 대한 제 관점이 변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전자라면 오카자키는 아주 잔혹한 작가이고, 후자라면 사랑에 과도할 만큼 충실한 작가겠죠. 근데 그 다음엔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두 관점 모두가 번갈아 나타나거나 뒤섞이고 있는 게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가 아닐까? 그러니까 한쪽이 틀렸다기보다는, 두 가지 독해 모두가 가능케 하는 무언가가 오카자키의 만화에 있는 게 아닐까? 이 둘 사이의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얘기할 수 있을 터이니, 당장은 여기서의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 잠시 음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근데 『핑크』만 봐도, 오카자키는 그런 방어기제를 전혀 안 깔잖아요? 이야기꾼으로서 오카자키가 특이한 건 욕망을 방어할 뚜렷한 근거를 대지 않으면서 그런 자발적인 욕망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욕망으로 인해 스스로가 곤경에 처하거나 심지어는 자멸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도 그것을 하고야 마는 모순, 그리고 서로 반대되는 방향의 상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욕망의 모순을, 거의 심리적 갈등 없이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 말이예요. 그래서, 169쪽을 잠시 봐주시면, 이 작품에서 유미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잖아요? 자기의 고객들이 자기 앞에서 보여준 모습과 TV에서 보여준 모습이 너무 다르다고요. 이를 인간 주체가 타인 앞에서 (연출이라기 보단) 수행하는 모습들 사이의 괴리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근데 이건 사실 유미도 마찬가지고요. ‘빨리 누군가의 부인이 되고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상상과 ‘왕자님 따위 기다릴 수 없다’는 상상은 과연 같은 선 위에 고스란히 올려질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욕망이 우리의 삶을 파탄 내고 파국으로 이끌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욕망 없는 삶 역시도 파국에 이끌리곤 한다는 겁니다. (///) 금방 “실존적 고민을 억제하고 은폐”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항상 모든 자극과 충격에 예민한 상태라면 우리의 삶은 매번 쇄신을 하는 게 아니라 금방 파국에 이를 거예요. 우리들의 욕망은 이런 이중의 역설에 놓여있습니다. 그 자유분방함으로 인간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한다는 역설, 그리고 그것이 없어도 인간이 위기에 빠진다는 역설 말이죠."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역 화장실에 대한 두 가지 실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