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쪽프레스 홈페이지에 「『핑크』 -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작년 10월에서 11월까지 나는 쪽프레스와 함께 만화 비평 모임 <오카자키의 뒷모습>을 기획 및 진행했었는데, 거기서 『핑크』(1989)를 소개할 때 쓴 발제문을 약간 수정해 여기 실은 것이다. (참고로, <오카자키의 뒷모습>의 멤버이자 나의 오랜 동료이기도 한 대중음악평론가 정구원 역시 함께 글을 실었다.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나는 여기에서 (성급하고 거친 분류법을 쓰자면) '만화가' 오카자키 쿄코보다는 '이야기꾼' 오카자키 쿄코에 대한 짧은 개론을 염두에 두어, 그가 파괴적이라 할 만큼 과격한 욕망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해 간략히 논해보았다. "욕망을 방어할 뚜렷한 근거를 대지 않으면서 그런 자발적인 욕망을 충실히 재현"하고 긍정하는 방식 말이다. 원래는 『헬터 스켈터』(2003)에 대한 발제문까지 함께 게재하려 했으나, 이 글의 경우는 논의할 영역의 폭이너무 넓어 당장은 손을 댈 수 없겠다는 생각에일단 미뤄두었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공개할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라... 참고로 이 글의 제목은, 본문에도 나와있듯 조지 손더스의 아름다운 강의록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발췌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 편집자님께서 붙이셨는데 썩 어울리는 것 같다. 아래는 글의 링크다.
"이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 저는 새삼스레 오카자키에 대한 제 관점이 변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전자라면 오카자키는 아주 잔혹한 작가이고, 후자라면 사랑에 과도할 만큼 충실한 작가겠죠. 근데 그 다음엔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두 관점 모두가 번갈아 나타나거나 뒤섞이고 있는 게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가 아닐까? 그러니까 한쪽이 틀렸다기보다는, 두 가지 독해 모두가 가능케 하는 무언가가 오카자키의 만화에 있는 게 아닐까? 이 둘 사이의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얘기할 수 있을 터이니, 당장은 여기서의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 잠시 음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근데 『핑크』만 봐도, 오카자키는 그런 방어기제를 전혀 안 깔잖아요? 이야기꾼으로서 오카자키가 특이한 건 욕망을 방어할 뚜렷한 근거를 대지 않으면서 그런 자발적인 욕망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욕망으로 인해 스스로가 곤경에 처하거나 심지어는 자멸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도 그것을 하고야 마는 모순, 그리고 서로 반대되는 방향의 상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욕망의 모순을, 거의 심리적 갈등 없이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 말이예요. 그래서, 169쪽을 잠시 봐주시면, 이 작품에서 유미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잖아요? 자기의 고객들이 자기 앞에서 보여준 모습과 TV에서 보여준 모습이 너무 다르다고요. 이를 인간 주체가 타인 앞에서 (연출이라기 보단) 수행하는 모습들 사이의 괴리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근데 이건 사실 유미도 마찬가지고요. ‘빨리 누군가의 부인이 되고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상상과 ‘왕자님 따위 기다릴 수 없다’는 상상은 과연 같은 선 위에 고스란히 올려질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욕망이 우리의 삶을 파탄 내고 파국으로 이끌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욕망 없는 삶 역시도 파국에 이끌리곤 한다는 겁니다. (///) 금방 “실존적 고민을 억제하고 은폐”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항상 모든 자극과 충격에 예민한 상태라면 우리의 삶은 매번 쇄신을 하는 게 아니라 금방 파국에 이를 거예요. 우리들의 욕망은 이런 이중의 역설에 놓여있습니다. 그 자유분방함으로 인간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한다는 역설, 그리고 그것이 없어도 인간이 위기에 빠진다는 역설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