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이랍니다.

: 드라마<신의 퀴즈>

by 오뉴월의 뉸슬

'희귀병'하면 보통 무엇이 떠오르는가? 영원히 고칠 수 없는 병? 약도 없는 난치병? 운이 안 좋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생기지만 나한테는 생기지 않을 어떤 것?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지만 실제로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혹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머리카락, 적색의 눈동자를 가진(백색증, 선천적색소결핍증) 엘프같이 아름답고 '특별'하고 신비로운 질환이 생각나는 가? 나 또한 그랬었다. 어릴 적부터 내가 알았던 희귀병들은 전부 메디컬 범죄 수사극 <신의 퀴즈> 에서 이미지가 고착되어 왔었다.


드라마 <신의 퀴즈>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지 못하는 '희귀병'을 주제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포피리아porphyrias 라고 하는 드라큘라병, 성장이 멈추는 하이랜더 증후군, 감정을 드러내면 죽는 반사적 무산소성 발작증RAS 등, '세상에 이런 희귀병들이 진짜 있단 말이야?' 하는 특이한 병들을 가르켜줬다. 나는 그 드라마에서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희귀병이 존재한다는 걸 배웠다. 처음에는 단지 범죄 수사물을 좋아해서, 주인공이 먼치킨이어서 좋아했만, 내가 직접 그 극 중 인물(희귀병에 걸린 사람 1역)이 되고 나니 <신의 퀴즈>를 더 이상 재미있게 볼 수가 없었다.




드라마 방영 내내 희귀병이 있는 사람들의 최후는 항상 같았다. 그들은 모두 슬퍼할 틈도 없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죽어서는 주인공이 해부를 하기 위한 시신으로 전락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희귀병이 주인공의 뛰어난 두뇌를 빛내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안 순간, 내가 드라마 속 수술대 위에 놓여있는 시신 같아 보였다. 어떨 때는 '주인공과 세상을 혐오 하는 악당' 같기도 했고, 약품을 뒤집어쓰고 '버려지는 배역' 같기도 했다. 허구헌날 주인공에게 간파당하고, 부검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악역인데도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신의퀴즈>에서 '희귀병'은 곧 단순한 소재거리로 전락해버렸고, 나는 환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 가가 아닌 무슨 병이 있어 죽어버린걸까가 중심이 된 이야기가 불편해졌다. 연민이 아닌 비참한 심정이 들었다. 그 후, 난 이 드라마를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폐동맥 고혈압 판정을 받았을 때, 누구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입을 틀어막고 엉엉 우는 사람을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병이 있다고 말하면 쉽게 수용할 수 있을까? 나는 알아 들을 수도 없었다. 진단명을 들었을 때 첫번째로 든 생각은 '그게 뭔데?'라는 의문 뿐였다.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나와 부모님의 얼굴을 본 의사는 폐동맥 고혈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폐동맥 고혈압은 심장에서 폐로 혈액을 보내는 혈관의 혈압이 높아지면서 폐의 혈액 공급이 원할하지 못하게 되는 병입니다. 폐에 혈액이 가게 만들어야 하니, 우측 심장이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면서 지치게 되고 기능이 떨어져 곧 충분한 혈액을 뿜어낼 수 없게 됩니다. 즉, 심박출량이 감소하여 운동 시에 호흡곤란을 느낄 수 있고, 쉽게 피로하거나 전신 무력감, 현기증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증상을 완화하는 방법으로는 아직 나이가 어려기 때문에 혈관 확장제를 써서 혈압을 낮추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희귀병에 걸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나는 반색했다. 병이 있기를 간절히 원했었던 나는 약을 잘 먹고 치료만 열심히 해주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숨이 조금 차고 운동을 못할 뿐이지, 행동에 제약이 없었던 나는 금방 좋아질 거라 생각했다. 내가 겪었던 일들이 모두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결백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병이 없다며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었다.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두드러기가 생긴 것도, 성대마비가 와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도, 달리기를 하면 맨날 꼴찌로 들어왔던 것도 모든 게 설명되기 시작했다. '설마 그 일이 다 폐동맥 고혈압의 시초가 아닐까.'


이제는 나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진짜 병이 있었구나.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약 먹으면 낫는다니까.'하며 안심하고 기뻐했던 게 후회가 됐다. '희귀병인데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네?'라고 생각하며 내 병을 쉽게 판단했었던 날들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병의 명칭만 알았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삼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병명이 하필 폐동맥 '고혈압'이라 고혈압과 비슷한 치료하기 쉬운 병이라고 생각한 내가 미웠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병이었지만 드라마에서와 같은 '희귀병'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현실의 희귀병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사실은 내가 특별한 걸까? 아니면 특이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 병이 특이한 걸까?' 희귀병에 걸린 역할들의 끝을 잘 알았던 나는 내 최후가 상상이 갔다. 나는 남은 평생을 드라마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렇게 나는 주인공에서 이름도 낯선, 죽음과 수술대가 어울리는 엑스트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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