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개발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신을 믿고 희망을 가진 대가

by 오뉴월의 뉸슬

사인펜 심만한 구멍으로 쏟아졌던 피가 서서히 멈춰 굳었다. 심도자 검사 이후 난 24시간만에 침대에서 일어나 소변을 볼 수 있었다. 어젯밤 8~10시간동안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못했던 시간이 생각났다. '상처가 아물었을련지 모르겠네.' 나는 밤사이 짓눌렸던 엉덩이를 침대에서 때 손으로 만져보았다. 꼬리 뼈는 뻐근하게 저려왔고, 엉덩이와 등은 땀이 흥건해 간지러웠다. 거울 앞에 선 나는 양손을 씻으며 얼굴을 살폈다. '얼굴이 엉망이네.' 병실에서 맞는 아침이 이제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텔레비전 바로 옆 초록색 벽시계가 12시를 가리켰다. 날이 밝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아직 심도자 검사를 하기 전 시간으로 맞춰져 있었다. 한번도 열리지 않던 문이 곧 열리고 식단을 챙겨주는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침대가 올려지고 간이 책상에 식사가 놓여지자, 그제서야 점심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밥을 먹기 위해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시술 부위가 아물었는지, 울컥하고 어제처럼 핏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내일 퇴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병실 안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했고, 고개를 위로 힘껏 재처야 볼 수 있었던 텔레비전 화면은 이제 질렸다. 입원한지 며칠되지도 않았는데 한달 째 좁은 1인실 방을 못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숨막혀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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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이모네 가족와 함께 큰 외삼촌네 가족이 병문안을 왔다. 이모는 두 손 가득 과일주스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옅은 미소로 엄마에게 먼저 인사를 건냈다. 한참 내 주의를 끌었던 텔레비전이 엄마의 손에 힘없이 꺼져버렸다. 생기 하나 없던 방은 곧 나의 안부를 물어보는 목소리로 넘쳐났다. '몸은 좀 괜찮니?' 외숙모는 엉망진창인 내 얼굴을 보더니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까운 가족 사이인데도 낯선 사람들을 보는 듯 불편한 감정이 생겼다. 그것은 마치 고요했던 공간에 침입자가 생긴 느낌이었다. 나는 외숙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허공을 응시하다, 억지로 괜찮다는 미소를 지었다.


환자는 난데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 들었다. 대화 나눌 이 하나 없던 이 곳에 말동무가 생긴 엄마는 신나보였다. 화기애애한 그들의 대화 속에서 나는 점차 소외되었다. 나를 위해 가져오지 않았을 과일 주스의 포장지가 오늘따라 잘 뜯기지지 않았다. 대화가 잠시 끊기자 엄마 쪽에 향했던 고개들이 하나둘씩 나에게로 돌려졌다. 10원짜리 동전만 한 그들의 눈동자에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내가 가득 담겼다. 그들은 초췌한 내 몰골을 보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고개를 떨군 채 팔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바라보았다.

현아(가명) 언니가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갈 주섬주섬 꺼내더니 나를 위해 선물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기대에 찬 나는 광대가 부푸러올랐다. 언니의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물체가 보일락 말락했다. '무슨 선물일까?' 언니가 가져온 그 선물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책’이었다. ‘엥? 선물이라며.’ 기대로 차 있던 내 얼굴이 순식간에 실망으로 물들었다. 내 품으로 언니의 달콤 쌉쌀한 호의가 들어왔다. 넘겨 받은 책에는 반쪽짜리 나비 날개와 눈알들이 바글바글거렸다. 나는 환 공포증이 도질 것 같은 누런 표지를 보자 흥미가 싹 사라졌다. 나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들이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기를 기도했다.



© joshuafuller, 출처 Unsplash




나에게 닥쳐온 시련은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이 고통 또한 지나가기 마련이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힘든 시련은 닥쳐올 수 있어. 그러나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이란 없어. 신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과 함께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주시니까 말이야.

-<프린세스 마법의 주문> 중에서-



언니가 선물한 책은 미국 시카고 방송국에서 앵커와 기자로 활동했던 작가 아네스 안이 쓴 자기개발서적이었다. 이제껏 독서를 재미없어 했던 나에게 '간절히 원하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문구는 나를 한번에 사로잡았다. 마법에 홀린 것처럼 한장 한장을 넘겼다. 책을 읽으니, 나도 변하고 싶다. 변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넘쳐 흘렀다.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아 구절에 밑줄까지 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책 속 문장들은 나에게 경건한 신앙심을 들게 했다. ‘그래, 책에서 말한 대로 시련은 곧 지나갈 거야.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을 거야.’


무조건적이었던 믿음도 잠시, 얼마 뒤 삼성 병원에서 나에게 난치성 희귀병 선고 내렸다. 애석하게도 신은 기회를 주어지지 않않다. 이유는 개뿔, 고통은 지나가지 않았고, 더한 고통으로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닥쳐오지만, 그것이 나한테만은 오지 않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병이란 시험은 인간따위가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변할 수 있고 잘될 수 있다는 믿음이 유리 조각마냥 깨져버렸다. 신을 믿고, 희망을 가졌던 대가가 참담했다. 서불리 맹목적으로 믿은 글귀들이 애석했다. 자기 개발서는 더 이상 나를 프린세스로 만들어줄, 보통의 인간으로 만들어줄 필독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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