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혈소군(8)

왕건의 손자

by 최재효



[중편소설]










왕건의 손자






대량원군이 비록 부모 형제는 없으나 궁궐에서 잘 적응하며 지냈다. 자식이 없는 황제는 대량원군을 친 아들처럼 돌보았다, 대량원군이 현명하고 행동 또한 점잖고 모난 데 없자 황제와 조정 중신들은 그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궁성과 개경 저잣거리에서도 대량원군이 학문에도 열의를 보이며 행동도 군자(君子)와 다를 바 없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중신들뿐만 아니라 의식 있는 양반들은 대량원군이 태조 왕건의 유일한 손자로 병약한 황제가 붕어하면 고려의 황제에 올라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들을 황제로 세우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김상궁, 너도 역시 쓸데없는 식충이로구나.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그냥 돌아오면 어쩌자는 것이야? 신혈소군이 다과를 먹고 죽어 자빠지는 꼴을 보고 왔어야지.”

천추태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태후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신혈암에 갔다가 당일 안으로 돌아오라고 하시기에 할 수 없이 귀궁했사옵니다.”

김상궁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저런, 그 말뜻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장을 보고 빨리 오라는 뜻이었다. 내가 너를 잘못 본 모양이다.”



김치양이 보낸 자객에 이어 김상궁도 신혈암에 갔다가 별무소득으로 끝나자 천추태후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생각 같아서는 군사들을 대동하고 당장 신혈암으로 달려가 대량원군의 목을 치고 싶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음모를 꾸미기로 했다.



[선휘판관 황보유의(皇甫兪義)는 낭장 문연(文演) 등과 함께 신혈암으로 가서 대량원군을 모셔 오도록 하라. 전중감 이주정(李周禎)을 서북면 도순검부사에 임명하니 즉시 서경으로 달려가 임무를 다하라. 서북면 도순검사로 서경에 주둔하고 있는 강조(康兆)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서 도성을 방어하고 황실을 보호하도록 하라.]



외척 김치양과 사련(邪戀)에 빠져 고려왕조를 망가트리려는 어머니 천추태후의 망동에 황제는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여러 번의 논의를 한 끝에 일련의 방책을 마련하였다. 전중감 이주정은 김치양의 핵심 심복이었다. 황제는 그를 서경으로 보내 김치양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개경 궁성을 비롯한 개경 저잣거리는 뒤숭숭했다. 곧 나라에 전란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조정의 분위기가 자신들이 의도한 것과는 반대로 흘러가자 몹시 당황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황보 유의 와 문연은 군사를 이끌고 신혈사로 향했고 강조에게도 황제의 밀지가 전해졌다. 고려의 정국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리무중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나라님이 김치양 일파를 축출하고 대량원군에게 다음 황위를 잇게 하려고 한 대요.”

“김치양 일파가 반란을 일으킬까 봐 강조를 개경으로 불렀대요.”

“강조도 야망이 큰 자로 알려졌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막으려다 잘못하면 강씨의 나라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천추태후는 참으로 멍청한 여인이야. 본인도 태조 왕건의 손녀인데 어째서 김씨에게 나라를 바치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며칠 전에는 김치양이 신혈사로 자객을 보내 대량원군을 죽이려다 실패했대요.”



“참으로 말세일세. 한 여인으로 인해 나라가 거덜 나게 되었어. 지금 같은 안개 정국에는 대량원군이 해답일세. 속히 원군이 황제가 되어 휘청대는 고려를 바로 세워야 하네.”



개경 저잣거리에서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천추태후의 악행을 입에 올렸다. 개경 백성들도 천추태후의 악행을 훤히 알고 있었다. 백성들 대부분은 대량원군이 속히 황제가 되기를 원했다. 황제는 유충정과 채충순 등에게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케 했다. 황제는 천추태후와 모자지간이지만 대량원군의 서신을 받은 뒤로는 천추태후와 모든 왕래를 단절하였다.



“나는 황궁에서 나온 선휘판관 황보 유의 입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으로 대량원군을 모시러 왔습니다.”

황보 유의 와 낭장 문연, 이성언(李成彦), 고적(高積) 등이 해가 중천에 오를 즈음 군사를 이끌고 신혈암에 도착했다.



“나무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원군께서는 출타 중입니다.”

진관이 정중하게 황보유의 일행을 맞았다.



“원군께서 사방이 눈구덩이인데 어디를 가셨단 말이오?”

“소승도 원군께서 어디를 가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이시라 산으로 가셨는지 아니면 초야를 둘러보시러 가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기다려 보시지요.”

진관이 대충 둘러댔다.



“대사님, 나는 황제 폐하께서 은밀히 보낸 밀사란 말이오. 나를 의심하지 마시오. 원군을 모시고 속히 환궁해야 합니다. 지엄한 황명(皇命)이오.”

황보유의가 진관에게 황명임을 힘주어 말했다.



‘이자들을 믿을 수 없다. 원군을 이 자들에게 인계하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 황제가 진짜로 특사를 보내올 때까지 원군을 보호해야 한다.’



진관은 황보유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둥글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의 모습에서 사악함이나 뇌꼴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속단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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