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보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진관과 대량원군이 암자 뒤로 달려갔다. 수십여 마리의 덩저리가 작은 짐승들과 까마귀들이 피를 토한 채 계곡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진관이 소리쳤다.
“이 녀석아, 그 음식을 땅에 묻어 버리라고 했더니 왜 풀어놓아서 멀쩡한 산짐승들과 새들을 죽게 했느냐? 네 녀석은 이 암자에 기거할 필요가 없다. 당장 하산하거라.”
“스님, 잘못했습니다.”
어린 경보가 불같이 화를 내는 진관에게 싹싹 빌었지만, 진관은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두 사람을 씁쓸한 얼굴로 말없이 바라보던 대량원군이 경보를 야단치는 진관을 말렸다.
“대사님, 이 사람 대신 미물들이 죽었습니다. 경보 스님을 너무 심하게 나무라지 마세요. 저는 이미 예상했던 일입니다. 천추태후의 악랄함이 다시 한번 증명된 셈입니다. 대사님께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원군은 고려 만백성의 희망입니다.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겨내셔야 합니다. 천추태후가 독이 든 다과를 보낸 것은 원군을 해치고 당신의 아들로 고려왕조를 찬탈하고자 함입니다. 당신께서도 태조의 핏줄이거늘 어째서 왕씨의 나라를 김치양의 나라로 만들지 못해 혈안이 되었는지 소승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추태후는 원군의 친이모가 아닙니까?”
진관은 고려 황실의 복잡 다단한 내부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대사님, 천추태후는 저를 낳아주신 헌정왕후의 친언니이십니다. 이 몸이나 김은이나 모두 불륜의 씨앗입니다.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들이지요. 하지만 이 몸을 낳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태조 왕건 할아버님의 아드님이시고 손녀였습니다. 그에 반해 김은(金銀)에게는 천추태후와 역적 김치양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천추태후는 현재 황제 폐하의 옥체가 미령 하시니 저를 제거하고 김은을 황제에 앉히려 합니다.”
“무서운 여인입니다. 장차 고려 황실에 피바람이 불 것 같습니다. 원군께서는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현재 고려 황실의 황제 계승 서열 수위(首位)는 누가 뭐래도 원군이십니다. 절대로 김씨의 불결한 씨앗이 고려 황제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소승이 목숨을 걸고 원군을 보호하겠습니다.”
진관이 대량원군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저도 원군을 지키겠습니다.”
“대사님, 경보 스님, 고맙습니다. 두 분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긴 대량원군은 이모 천추태후의 악독한 소행에 치를 떨었다. 대량원군이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궁궐에서 기거할 때는 한없이 자애로운 이모였다. 그러나 성종 임금이 승하하고 천추태후의 아들 왕송(王誦)이 황제가 되면서 사정이 변하고 말았다.
천추태후는 귀양 가 있던 김치양을 궁궐로 불러들여 고위직 벼슬을 주고 다시 불륜의 꽃을 피우면서 그들 사이에서 김은이 태어난 것이었다. 대량원군은 착잡한 심사를 날려 버릴 겸 경보와 삼각산을 올랐다. 멀리 *남경 일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산 중턱을 휘감고 흘러가는 차가운 구름을 보고 즉흥적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一條流出白雲峯(일조유출백운봉) 萬里滄溟去路通(만리창명거로통)
莫道潺溪巖下在(막도잔계암하재) 不多時日到龍宮(부다시일도용궁)
백운봉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한줄기의 물은
만 리 먼 푸른 바다로 흘러가는구나
바위 아래 물이 약하다고 폄하지 말라
용궁에 가 닿을 날도 눈앞에 다가왔으니
계수(溪水)라는 이 시는 대량원군이 아버지 왕욱(王郁)과 사수현에 있을 때 지은 소사시(小蛇詩)와 내용이 비슷했다. 계수에도 대량원군은 머지않아 자신이 고려의 황제가 되겠다고 하는 의지가 투영되어 있었다. 그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도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반드시 악의 씨앗들을 처단할 것을 다짐했다.
왕순은 대량원군에 봉해지기 전에 경상도 사수의 배방사(排房寺)에 십 년간 기거하였다. 성종 임금에 의해 조카인 헌정왕후와 사통 한 왕욱은 경상도 사수현(泗水縣) 남쪽 땅 귀룡동(歸龍洞)에서 귀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종은 어느 날 두 살배기 왕순이 자신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궁궐에서 부모 없이 지내는 왕순이 불쌍하여 보모를 딸려 사수현의 배방사로 내려보냈다.
사수현 귀룡동에서 쓸쓸히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왕욱에게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아들을 볼 수 있게 되니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십 리 길을 걸어 아들을 보러 배방사로 향했다. 그러나 부자 상봉의 즐거움도 잠시였다. 아들과 상봉한 지 4년 만에 왕욱이 그만 병사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도 왕순은 보모와 사수에서 지내야 했다. 개경의 황실 사람들에게 왕순은 잊힌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왕순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현재의 황제는 왕순에게 대량원군이라는 봉호(封號)를 부여하고 개경 궁성에서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