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혈소군(6)

황제의 밀지

by 최재효



[중편소설]












황제의 밀지








“폐하, 대량원군은 불륜의 씨앗입니다. 그자를 가까이 두시면 안 됩니다. 현재는 출가하여 신혈암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자보다는 차라리 천추태후 님의 아들인 김은을 태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합당하옵니다. 김은은 우복야와 천추태후 님의 소생이니 태조 황제의 피도 흐르고 있사옵니다. 왕순은 이미 부처의 제자가 되었으니 속히 김은을 태자로 책봉하소서.”

유행간은 노골적으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복심을 전하고 있었다.



“김은 또한 불륜의 씨앗이 아니오?”

황제의 용안에 노기(怒氣)가 서렸다.



* 합문사인 - 閤門舍人.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정4품 관리.

* 좌사낭중 - 左司郎中. 정5품 관리.



“폐하, 대량원군은 태조 황제의 유일한 손자입니다. 즉 양친이 모두 태조 황제의 피를 이었다는 증좌입니다. 김은은 천추태후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반쪽은 우복야 김치양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원군은 타의(他意)에 의해 할 수 없이 입산하셨습니다만, 폐하의 명이 있으면 언제든 환속하실 수도 있사옵니다.”



유충정은 은연중 유행간의 주장에 각을 세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음-, 유행간은 김치양의 사람이다. 그러니 김치양의 자식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은 겉으로는 유행간과 같은 부류로 보이기는 하지만 김치양에 대한 반감이 있구나. 앞으로는 유충정을 믿어야겠구나. 얼마 전에도 자신이 김치양으로부터 내응(內應)을 부탁받았지만 거절했다고 짐에게 고한 바 있다. 진정으로 유충정이 충신이로다. 유행간을 왕륜사(王輪寺)에 심부름을 보내야겠다.’



황제는 유행간에게 왕륜사에 가서 선대왕 성종의 명복을 비는 재(齋)를 올리도록 했다. 유행간은 영문도 모르고 황제의 명을 수행해야 했다. 유행간이 없는 틈을 타서 황제는 유충정을 은밀히 불러 밀지를 건넸다.



“좌사낭중은 이 밀지를 지금 즉시 중추원부사 채충순에게 전해주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유충정은 시간이 없다는 황제의 말뜻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유충정은 대전을 비울 수 없어 감찰어사 고영기(高英起) 편에 황제의 밀지를 채충순에게 전달하게 했다. 고영기는 즉시 채충순을 찾아갔다.



[짐의 병이 점차 위독해져서 곧 죽게 될 것만 같습니다. 태조(太祖)의 정통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 왕순만 남았습니다. 경은 중추원사 최항(崔沆)과 더불어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대량원군을 보필하여 고려의 사직(社稷)이 다른 성씨에게 돌아가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채충순은 고영기가 전달한 황제의 밀지를 읽고 대성통곡하였다. 고영기가 대궐을 나가고 한 시진이 지나서 도성의 서쪽 신의문이 열리고 곧 내성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중광전으로 두 신하가 들었다. 삼경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폐하, 중추원부사 채충순 입시하였습니다.”

“폐하, 중추원사 최항입니다.”



두 신하가 황제 앞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두 사람은 황제의 밀지를 받고 즉시 대궐로 달려온 것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라에 변고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황제는 신하들을 만나지 않았다. 채충순과 최항은 황제가 가장 의지가지하는 신하였다. 대궐 곳곳에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심어 놓은 심복들이 있어 황제는 낮에는 중신을 별도로 부르지 않았다.



* 중광전 - 重光殿. 고려 개경 궁성의 전각으로 황제가 주로 기거하는 전각.



천추태후가 내리는 다과를 가지고 신혈암을 찾았던 김상궁 일행은 밤늦게까지 머물다 그냥 환궁할 수밖에 없었다. 김상궁은 다과를 두고 가면서 진관에게 ‘태후의 명이니 대량원군이 돌아오면 반드시 다과를 들게 하라’고 했다. 궁인들이 떠나자 수미단 아래에 은신하고 있던 대량원군은 밖으로 나와 천추태후가 보낸 다과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이 침이 넘어갈 정도였다. 진관은 꺼림칙한 마음에 대량원군에게 절대로 다과를 맛보면 안 된다고 말하고 경보를 시켜 암자 뒤에 묻어 버리라고 했다. 다음날 경보는 암자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고급 음식이라 진관 몰래 한입 베어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진관이 절대로 손대지 말고 버리라고 한 지시를 어길 수 없었다.



경보가 다과를 땅에 묻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과를 쌌던 보자기를 풀어 놓으니 곧 까마귀 떼와 산짐승들이 몰려들어 다과를 먹기 시작했다. 산짐승들은 산과 계곡에 눈이 쌓여 오래 굶주린 상태였다. 잠시 후 산짐승들이 울부짖으며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까마귀들 역시 허공을 날다가 떨어졌다. 경보가 놀라 진관에게 달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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