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편소설]
중천태왕과 김옥모 태후 눈을 맞추다
관나부인과 태왕 사이에도 아들 공(貢)이 있었다. 그녀는 태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연왕비를 끊임없이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그녀는 궁중에 무녀(巫女)를 불러들여 연왕비를 저주하게 했다. 태왕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차츰 관나부인도 멀리하고 새로 들어온 후궁 연감(淵甘)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태왕이 연왕비의 처소에 들자 왕비는 관나부인이 예전에 동천태왕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을 고해바쳤다. 그리고 그녀는 위나라 황제가 장발의 여인을 좋아하니 관나부인을 그에게 시집보내라고 태왕에게 간청했다.
태왕이 연감과 기구(箕丘)로 사냥 간 틈을 타 연왕비와 관나부인은 육탄전을 벌이며 궁성을 소란스럽게 했다. 태왕이 돌아오자 관나부인은 태왕을 찾아가 울면서 연왕비가 자신을 쇠가죽 부대에 넣어 죽이려고 했다며 하소연했다.
태왕은 연왕비와 관나부인이 싸우는 것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관나부인의 하소연은 결국 거짓으로 밝혀졌고 이에 대로한 태왕은 관나부인을 처벌하였다.
“관나를 쇠가죽 부대에 넣어 서하(西河)에 던져버려라.”
관나부인은 나이 겨우 21살인데 스스로 투기로 인하여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고구려 왕실에 여인들로 인하여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나서 안정을 찾을 때쯤이었다. 계림국의 태후와 월정 공주가 온다는 보고를 받은 태왕은 기대에 차 있었다. 열 여인 마다하지 않는 그의 타고난 성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태왕은 신하들을 국경까지 보내 그미와 석정 공주를 영접하게 했다.
“태왕 폐하의 성은이 하해와 같나이다. 소신은 계림국의 태후 김옥모라 하옵고, 이 아이는 소신의 딸 월정이옵니다.”
그미와 월정 공주가 고구려 왕궁에 들어 태왕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고구려는 대국이고 계림국은 보잘것없는 소국이라 생각하여 그미는 스스로 태왕의 신하라 자청했다. 대소신료들은 고구려가 건국된 이후로 처음 있는 신기한 일이라며 절색(絶色)의 모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여인이 계림국의 옥모 태후라고? 아, 한 마리 고고한 황새로다. 이제까지 짐과 인연을 맺은 관나부인이나 연감 등은 한낱 참새나 뱁새에 불과하다. 하늘은 왜 이제야 나에게 황새를 보낸 것일까? 피부는 백옥보다 더 희고 매끈하며, 웃을 때면 생기 있게 보이는 단순호치는 음양의 조화를 이미 터득하고 남음이 있어 보인다. 반달처럼 생긴 짙은 아미(蛾眉)와 상아로 깎아 놓은 듯한 얼굴은 수많은 사내 가슴에 불을 지펴놓았을 것이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꿈속에 한 미인이 나타나 잠을 설치게 하더니만, 그 가인이 바로 옥모 태후였구나. 그 옆에 서 있는 아이는 짐에게 시집올 계림국 월정 공주일 테고. 그런데 어찌 된 것이 어미는 월궁의 항아(姮娥) 뺨치는 미모인데, 저 아이는 아직도 젓 냄새가 덜 가신 듯하다. 이삼 년쯤 지나야 원숙한 여인 티가 좀 나겠어.’
태왕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듯 넋을 잃고 모녀를 바라보았다. 중신들이 헛기침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태왕은 눈을 한번 비비고 나서 모녀를 반겼다.
“오, 과연, 과연 두 사람 모두 듣던 대로 경국지색입니다. 서천에서 강림하신 *서왕모(西王母)와 그의 딸 요희(瑤姬)가 틀림없습니다. 어서, 어서 이리 가까이 오세요. 짐은 두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밤잠도 잊은 채 뜬눈으로 지새워 속이 은결들 정도랍니다. 짐의 이 목 좀 보세요. 학(鶴)의 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명한 태왕이 모녀를 보더니 갑자기 어둔한 몸짓으로 허둥거렸다. 태왕은 중신들의 입을 통해 그미와 월정 공주의 면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미와 공주를 직접 가까이 보니 태왕은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마구발방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할 지경이었다.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는 태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미를 여자 신선 중의 최고의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서왕모라 하였고, 월정 공주를 서왕모의 딸이며 *요지(瑤池)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진 요희라고 불렀다.
* 서왕모 - 도교 신화에 나오는 불사의 여선(女仙)으로 모든 신선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한다.
* 요지 –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곳으로 서왕모가 살고 있는데, 3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 복
숭아) 나무와 십장생(十長生), 기화요초들 사철 만발해 있다.
“소신, 폐하를 알현하오니, *주목왕(周穆王)이나 *유철(劉徹)은 감히 비견될 수도 없으며, *동왕공(東王公)이 강림하신 줄 알았사옵니다. 참으로 선풍도골이오며, 대제국의 주인이십니다. 소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폐하 같은 헌헌장부는 처음 뵙습니다.”
그미의 찬사에 태왕은 지리산 가리산 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짐을 그리 높게 추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멀리 계림국에서 서왕모가 오셨으니 *반도연회(蟠桃宴會)를 열어야겠습니다.”
“폐하, 그렇다면 소신이 고래의 눈, 곰 발바닥, 기린 입술, 용의 간으로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고,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도 푸짐하게 준비하여 잔치를 흥겹게 만들어 보겠나이다.”
“오호라! 염화미소로다. 이심전심이로다. 옥모 태후, 아니 서왕모께서 손수 준비를 하신다니 짐은 복이 많은 사내가 분명합니다.”
태왕의 이상한 태도에 중신들도 어리둥절했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녀의 화려한 미모와 태도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태왕과 그미는 도가(道家)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신들은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의 뜻을 몰라 우두망찰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 주목왕 – 주나라 제5대 왕으로 요지에서 서왕모를 만나 연회를 즐겼다고 함.
* 유철 – 한나라 제7대 황제인 한무제로 서왕모를 초빙하여 연회를 즐겼다는 전설이 있음.
* 동왕공 – 서왕모와 혼인한 사이로 부상대제동왕공(扶桑大帝東王公)이라고도 불림.
* 반도연회 – 서왕모의 생일이나 큰 회의가 있을 때 요지에서 행해지는 연회로 산해진미와 3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복숭아가 제공된다고 함.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