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편소설]
모전여전
‘태왕께서 좀 이상하다? 태왕과 혼인할 사람은 난데 모후만 바라보니, 혹시 태왕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멀리서 온 신붓감을 몰라보다니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어머니가 태왕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태왕은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취향을 지녔나 보다. 계림국에서 보낸 사신이 고구려와 계림국 간의 국혼(國婚)에 관하여 자초지종을 전했을 터인데…….’
월정 공주는 혼잣말로 중절거리다 용기를 냈다. 가만히 있으면 어머니 때문에
자신은 태왕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만 같았다.
“폐하, 소녀는 계림국 세신갈문왕 석골정과 김옥모 태후의 둘째 딸로 폐하께 의탁하고자 불원천리 하고 고구려를 찾아왔사옵니다. 부디, 소녀를 어여삐 여기시고 거두어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오, 그대가 옥모 태후의 딸이며 첨해 이사금의 친동생 월정 공주라 했겠다? 과연 그 어미에 그 딸이로다. 어쩌면 그리도 어미를 빼닮아 절세가인 일꼬? 잘 왔구나. 짐이 장차 그대를 어여삐 여길 것이니라.”
‘장차 어여삐 여긴다?’
“폐하, 소녀는, 소녀는 두 나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 폐하의 옥체를 더욱 강하게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폐첩(嬖妾)이 되고자 하나이다. 어머니는 곧 계림국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월정 공주가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미가 돌아간다는 말을 하자 태왕은 펄쩍 뛰었다. 그미는 철딱서니 없는 딸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그미의 반응에 월정 공주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 폐첩 – 귀여움을 받는 첩
“아, 안 된다. 짐의 윤허가 있기 전에는 태후는 고구려를 떠날 수 없구나.”
“폐하, 소신은 고구려와 계림국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싶어 딸과 수천 리 떨어진 국내성(國內城)까지 왔나이다. 양국의 관계가 사이좋은 형제처럼 될 때까지 고구려에 머물 것이니 염려하지 마소서.
또한, 폐하께서 소신을 서왕모라 칭하시니 어찌 지아비인 동왕공을 두고 떠날 수 있겠나이까?
곤륜산 위에는 크고 높은기둥이 있는데 하늘에 닿는다고 했습니다. 이 천주(天柱)는 길이가 삼천리이고 기둥주위에는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선인구부(仙人九府)가 있습니다.
그곳에 큰 새 한 마리가 사는데 희유(希有)라고 합니다. 그 새의 척추 부분이 일만 구천리라 하는데, 울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늘 남쪽을 향해 서서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동왕공은 이 새의 좌측 날개 밑에 살고, 서왕모는 우측 날개 아래 살면서 희유의 날개 위로 올라가 회포를 푼다고 했습니다. 동왕공이 신 폐하께서도 저희 모녀를 희유 오른쪽 날개 아래 사는 서왕모와 요희로 여기시고 어여삐 여기시면 각골난망이겠습니다.”
태왕은 그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본인과 통하는 부분에서는 ‘그렇지’, ‘그럼’ 하며 맞장구를 쳤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짐이 오랜만에 태후와 더불어 도가의 전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월정 공주는 짐의 다의(茶儀) 역할을 맡길 것이니, 그리 알고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택일하여 혼례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태왕은 그날 저녁 그미와 월정 공주를 환영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에는 고구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물론 왕실 인사들도 대거 참석하였다. 태왕은 대제국의 군주로서 그미에게 위신을 세우고 싶었다. 소와 돼지 수백 마리를 잡고 이웃 나라에서 조공으로 바친 산해진미가 주연상 위에 태산같이 올려졌다.
그날은 태왕의 명령에 따라 대궐 앞마당과 궁성 밖에도 임시 천막을 치고 도성에 사는 백성들까지 불러 고기와 술을 배불리 먹도록 했다. 온 성이 떠나갈 듯 왁자했다.
오늘같이 태왕이 도성 백성들까지 불러 주연을 베푸는 일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백성들은 모두 저잣거리로 나와 먹고 마시며 태왕과 계림국 태후 이야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과연 연불 태왕은 통이 크고 대인의 풍모를 지니셨어. 우리 같은 무지렁이에게도 술과 고기를 내리시니 지금이 바로 태평성대가 아니겠는가?”
“이보게 흥부, 이게 무슨 술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이 술은 국혼을 축하하는 술이야. 태왕께서 계림국 옥모 태후와 혼인을 하신대.”
“아니야, 놀부 자네가 잘못 알고 있네. 옥모 태후가 아니라 태후의 딸 월정 공주와 국혼을 하는 거래. 똑바로 알고 떠들라고. 모르면 술이나 마시고.”
백성들은 술을 마셔대면서 태왕을 칭찬하느라 열을 올렸다.
“예쁜 여인이라면 환장하는 태왕께서 저절로 굴러온 호박 두 개를 그냥 둘 것 같은가? 하나는 구워 먹고, 또 한 개는 호떡을 만들어 먹겠지. 지난봄에 서하에 수장(水葬)당한 관나부인만 억울하게 되었네. 지금쯤 원귀(冤鬼)가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을 거야.”
“이 사람아, 목이 몇 개라도 되는가? 말조심하게.”
“말똥이 말이 맞네.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여인네 고샅 구경이나 한번 할 수도 없는데, 궁성에 비빈이 넘쳐나지 않는가? 그런데 멀리 계림국에서 두 마리 암 여우가 제 발로 왔으니 태왕은 오죽이나 좋겠는가?”
술에 취한 사내들은 옆에 관리나 군사들이 있어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모두가 취한 상태라 태왕을 험담하든 또는 칭찬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국내성 밖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도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궁성과 저잣거리는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루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