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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모(5)

신라 모녀, 고구려 왕실을  접수하다

by 최재효 Apr 20. 2023


[역사 중편소설]










태후 모녀, 고구려 왕실을 접수하다





고구려, 백제, 계림국 왕실 사내들의 최대관심사는 영토확장을 위한 주변국 정복 전쟁이 아닌 *어녀술(御女術)이었다. 특히 자신이 영웅호걸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호기를 부리는 사내들의 경우에는 여인의 호감을 사고 잠자리까지 이어지는 신비한 묘술을 터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 어녀술 - 잠자리에서 남성이 여성을 다루는 기술.    


 “이 그림을 잘 보아라. 남녀의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신묘한 영물이란다. 여인은 본 임무인 후손을 생산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다음 단계란 바로 지아비가 지극한 행복감을 맛보게 해줘야 한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더라도 비단 금침 위에서 지아비의 혼을 빼놓지 못하면 쫓겨나게 된다.”

 “모후, 망측스러워요.”



 월정 공주는 그미가 보여주는 규방 비술이 그려진 화첩(畫帖)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와 딸이 묘한 그림을 보며 사내를 어찌하면 단박에 자신의 사람을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는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딸에게 운우(雲雨)의 기교를 가르치는 그미나 배우는 딸이나 얼굴을 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들어봐라. 방중술이란, 음양(陰陽)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올바른 교접을 통해 인간의 기(氣)를 원활하게 유통시켜 천수(天壽)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란다.


즉,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방종하게 사용하지 않고 올바르게 발산하면 음양의 이기(二氣)가 조화를 이루어 불로장수할 수 있단다. 지나치게 방사를 가져도 안 되고 그렇다고 무조건 금욕을 해서도 안 된다.


규방술은 철저하게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게 목적이고 남녀의 관계를 그 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철저히 본질에 접근해야 규방술의 진정한 뜻을 이룰 수 있단다.”



 “모후, 소녀는 아직 사내를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항간에는 남녀가 관계하기 전에 어떤 묘약을 쓰면 좋다고 하는데, 그 묘약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월정 공주는 사내와 관계를 맺지 않았을 뿐 그 방면에 상당한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미도 딸이 사내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월정 공주는 온상에서 자란 화초와 같았다.



 “어미가 애용하던 묘약 하나를 소개하마. 그 묘약은 네가 고구려에 갈 때 어미가 다량으로 만들어 너에게 줄 것이야. 말벌집인 노봉방(露蜂房)을 채취해서 하룻밤 눌러 놓은 후 명주로 만든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장대에 걸어 백일 동안 그늘에 말린다.


그것을 소량을 항아리 속에 넣고 볶는다. 검은색 재가 하얀색 재로 변할 때까지 볶고는 그것 반 푼(分)을 따뜻한 술과 함께 복용하게 하고 또 반은 타액으로 짓이겨 양물에 발라주면 사내가 효험을 볼 수 있단다.”



 “모후, 참으로 흥미가 있습니다.”

 그미의 설명에 월정 공주의 눈망울이 샛별처럼 빛났다.



모녀는 밤마다 각종 규방 비서(祕書)를 보며 남녀의 다양한 체위와 음양의 조화에 관하여 연구하거나 목각인형으로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하였다. 그미의 구체적인 설명과 실험은 월정 공주를 어느새 황제(黃帝)에게 소녀경(素女經)을 가리키던 채녀(采女)의 수준에 버금갈 만큼 경지에 오르게 했다.



 “소녀경에서 말한 팔익 중에서 칠익(七益)이 무엇이더냐?”

 그미가 어느 날 월정 공주에게 물었다.           


                

 “그것은 익액이라 하며 자(雌)가 엎드리면 웅(雄)이 뒤에서 시도합니다. 음양의 접점에서 파정하지 않고 일흔두 번 헤아려서 시행합니다. 이를 열흘 간  반복해서 시행하면 뼈에 골수가 가득 차 단단해지고 신장의 기능이 향상됩니다. 활짝 핀 꽃이나 꿀을 따는 벌에게 모두 이득이 되지요.”

 “그만하면 너도 어느 정도는 경지에 이른듯하구나.”



 무서리가 내린 늦가을 그미는 월정 공주와 고구려로 향했다. 첨해 이사금이 국경까지 가서 고구려로 가는 그미와 공주를 전송했다. 계림국의 태후가 공주와 함께 고구려로 가는 일은 처음 있는 대사건이기도 했다. 이미 한 달 전에 첨해 이사금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그미와 석정 공주의 방문과 목적을 알렸다.



모녀의 고구려 방문은 단순히 친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첨해 이사금은 여동생 월정 공주의 혼수 예물로 금은보화와 계림국의 특산물을 수십여 대의 우마차에 실어 보냈다. 고구려 국경으로 향하는 그미의 일행이 십여 리에 걸쳐 이어졌다.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5부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왕족인 계루부가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크고 다음으로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배출해 온 연나부(椽那部)였다. 왕비 연 씨(椽氏)와 관나부인의 암투가 심하여 날이 갈수록 가관이었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으며, 이미 선왕인 동천 태왕에게 승은을 입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때 연왕비도 관나부인과 함께 동천 태왕을 모시며 의자매를 맺게 되었는데, 동천 태왕이 붕어하자 두 사람 모두 연불 태왕의 후비가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소비(小妃)들을 거두어 자신의 후비(后妃)로 삼은 것이다.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가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



연왕후가 낳은 아들 약로(藥盧)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연왕후는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관나부인을 우습게 알고 하대하면서 두 사람은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에 질투심이 극에 달한 관나부인이 태왕에게 연왕비가 한때 붕어한 동천태왕을 모신 일을 일러바쳤다. 이에 태왕은 연왕비를 천박하게 여겨 점차 멀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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