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옆집이 창문으로 눈에 들어온다. 지붕 위 안테나에 새들이 날아들며 요란스레 지저귄다. 잠시 합창 행진이 이어지더니 훌쩍 날아간다. 초록색의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잔디가 나를 불러낸다. 정원에 나가 기지개도 켜고 심호흡을 하면서 어둠이 빛을 밀어내려는 초저녁 하늘을 본다. 아직 하늘은 파랗다. 석양에 물든 뭉게구름이 가볍다. 먼 북쪽의 하늘도 저랬었다. 푸른 꿈을 품고 파란 하늘을 날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하늘처럼.
비행기 한 대가 소리도 없이 구름 속을 넘나들며 북쪽으로 향한다. 호주 딸집으로 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여러 차례 왔지만 여전히 낯선 땅이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내와 딸 내외, 손주들과 함께 있다. 지금 이 공간의 나를 어떤 시간의 흐름이 데려다 놓은 것일까? 유년의 하늘을 떠올려서인지 인생행로의 감회가 인다.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에 나오는 구절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피로한 여행을 마친 후 나는 기지개를 켰고 굉장한 배고픔을 느꼈다. 오랜 비행에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나는 큰 보폭으로 탄력 있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에도 내가 그림자를 다시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착륙이었다." 착륙은 그림자를 다시 갖는 것이고, 그것은 기쁨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인생을 비행에 빗대 본다. 나의 시간, 나의 인생 비행(飛行)은 어땠을까? 삶의 여정이 구름과 비바람을 헤치고 하늘을 나는 비행과 닮았다. 시간도 비행이 아닐까? 내 인생은 길고도 두려움 가득한 비행이었을까? 나약한 비행이었을까? 지난 일들이 구름 흩어지듯 흐르다 옅은 조각 하나만 남는다. 학교 일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두려운 때, 그만 눕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행복한 비행이었다. 정년퇴직이라는 소프트 랜딩을 하고난 지금은 새로운 두려움과 나약함이 없는 편안한 비행중이라고나 할까?
며칠 걸려 호주에 몇 달 머물 준비를 했다. 공항 수속도 있지만 어서 가고 싶은 무려 4시간 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화물도 부치고, 쇼핑도 하고, 공항 라운지에서 여유를 부리기도 하면서 설렘을 달랬다. 딸네는 호주 브리즈번에 산다. 자주 가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한번 가면 2, 3개월을 머물렀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겨울, 호주의 여름에 다녀오곤 했다. 피한(避寒) 여행을 겸한 셈이다. 그런데 이번엔 호주의 겨울에 왔다. 건강이 염려되어 피하고 싶은 계절이지만 손자 알렉스의 첫돌이 7월에 있기 때문이었다. 작년 7월 손녀 그레이스에게 동생이 생겼다. 세상 구경하러 나온 손자를 보려고 왔다가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갓 난 손자를 뒤로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출산이라는 공통 경험을 가진 여인으로서 딸에 대한 연민이 컸으리라. 헤어지는 아쉬움이 마찬가지지만 아내의 눈물 때문에 내 울음은 삼켜 버렸다.
한국에 있을 때는 딸, 손주들과 영상통화를 하곤 했다. 손녀 그레이스는 엄마, 아빠에게는 영어로 말하지만 우리에겐 한국어로 “하머니, 하부지 어디 있어?” “하부지, 빨리 여기 와!” 했다. 똑 끊어지지 않는 발음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럴 때마다 코끝이 시큰하며 보고 싶은 마음에 화면 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레이스는 7년 전에 선물처럼 우리에게 왔다. 그레이스에게는 사랑을 주어도주어도 늘 부족한 것만 같다.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서 ‘프렙스쿨(Prep school)’, 우리나라 학제로 말하면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다닌다.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열심히 배우면서 놀기도 잘 논다. 내 눈에는 그림과 춤에도 솜씨가 있는 것 같다.
그레이스의 엄마는 나와 아내의 외동딸이다. 아내와 나는 결혼할 때 아이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약속했다. 아내와 나 모두 형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내는 딸을 낳고 한두 차례 유산 끝에 불임수술을 받았다. 내 탓만 같아서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아내는 제자였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리고 38년이란 세월을 내 뒷바라지만 하며 살아온 반려자다.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한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가 힘들어 할 때나 건강이 좋지 못할 때 옆을 지켜준 사람이다. 종교적 갈등으로 방황할 때도 챙겨 주고 학교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던 아내다. 지금은 내리사랑에 손주들을 더 가슴에 안아 보고 싶어 한다.
긴 비행시간이 지루하여 잠을 청해보지만 손주들 생각만 하면 눈앞에 어른거려 잠이 달아나고 만다. 와인을 마셔보기도 하고 두세 편 정도의 영화를 보다가 잠 한숨 못자기 일쑤다. 도착 시각만을 기다린다. 이윽고 열 시간을 날아 브리즈번에 착륙한다. 딸과 손주들에게 주려고 바리바리 싸온 물건을 담은 가방을 찾아 들고 검색대를 통과한다. 공항 대기실로 빠져나오는 순간 야간 비행의 피곤함은 사라진다.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며 입부터 눈으로 미소가 번진다. 그레이스부터 양손으로 안는다. 두 개의 심장이 겹친다. 작은 심장의 고동이 전해온다. 편안하다. 이런 게 어쩔 수 없는 피붙이의 끈끈한 정인가 보다.
브리즈번의 풍경이 차창을 스치며 뒤로 물러난다. 기억에 새겨진 아름다운 가로수 길과 자연 풍광,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널따란 고속도로, 하늘에서 바라본 호수를 품은 육지에서 좀 전까지 머물던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40여 분 정도 달려 그리던 집에 도착해서 딸과 손자 알렉스를 일곱 달 만에 가슴에 품는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눈물은 왜 기쁠 때도 나는지.
야간 비행도 새로운 인생 비행도 즐겁다. 삶의 이착륙이 있듯이. 어두워진 밤하늘에 비행기에서는 보지 못했던 수많은 별이 반짝인다. 하나둘 별들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어린 왕자≫가 벌이는 별들의 잔치를 남겨두고 방으로 들어선다. 나의 작은 공간을 담은 노트북을 연다. 귀에 익은 음악을 듣는다. 지금은 그림자를 찾을 시간. 조용히 착륙해 책을 펼친다. 또 다른 비행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