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하면 많은 사람이 애송하던 김춘수 시인의 시〈꽃〉이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의미에서부터 빛깔과 향기까지 보여준단다. 이처럼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었다. 내 인생에 나타난 이름의 변화를 보면서….
태어날 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규범(홀 圭, 법 範)’이었다. ‘항상 일러 깨우치고 법대로 잘 지내야한다’ 는 뜻으로 지었다 하셨다. 아버지는 도둑 잡고 나쁜 사람 잡는 경찰이어서 나는 어린 마음에 늘 아버지를 두렵게 느끼며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엄격한 분이고 근엄하셨던 분으로 알며 지냈다. 그런 분이시지만 모두에게 자상하시고 가정적인 분이셨음을 뒤늦게 초등학교 입학하고부터 알았다.
초등학교 6년간 개근에 우등에다 반장을 놓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로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겐 큰외삼촌이 있었는데 육군 대위였다. 견장과 계급장이 멋있어 보여 그 당시에 롤 모델로 생각했었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두려움을 느낀 경찰보다 육군 장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규범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모범생임을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 자신의 ‘한(恨)’을 어린 나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도 검찰과 경찰의 관계가 수직 관계라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엔 엄청나게 차별이 있었나 보다. ‘규범아! 넌 꼭 검사가 되어야 한다.’ 하신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어린 마음에 ‘경찰보다 더 계급이 높아 아버지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가 바라는 검사가 돼야지!’
초등학교 졸업 즈음 내 이름은 ‘기수(터 基, 빼어날 秀)’로 바뀌었다. 6.25 한국전쟁 때 월남한 아버지는 3형제 가족 중 맏이라 작은 집 아이들 이름과 함께 개명해야 한다며 항렬을 ‘터 基’자 돌림으로 남자 이름을 짓게 했다. 기영, 기수, 기홍, 사촌들은 기훈, 기주로. 내 이름의 뜻이 터에서 빼어나라는 의미여서 왠지 뿌듯한 마음을 가졌다. 검사보다는 더 큰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해 주신 걸까? 아무튼 이름 기수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검사도 장교도 둘 다 돼 보고 싶었다.
바뀐 이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했지만 일어난 일들은 중학교 들어갈 때부터 실망을 안겨주었다. 특차 중학교 입시에서 떨어져 모집정원 미달 중학교에 들어간 일이 시작이다. 이후 공립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하여 후기 고등학교에 입학한 일, 세칭 일류 대학 입시에 불합격하여 눈물을 맛보며 재수의 길로 갔던 때, 또다시 재수의 실패로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검사와 장교의 꿈은 이때부터 먼 거리로 물러났다. 비로소 모든 터에서 아니 실패로 얼룩진 터에서 과연 기수가 운명인가!
고진감래(苦盡甘來), 아니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할까, 후기 대학에서 전공도 살리고 교직도 이수해서 교사가 되었다. 내 운명이 된 거듭난 이름대로 학교 터에서 그런대로 인정받는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내가 겪어온 실패담과 겪었던 일들을 회상해 가면서. 넉넉한 믿음의 학교 터에서 빼어난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선생님’보다 ‘기수님’으로 부르라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처럼. 언제나 일상의 터에서 빼어난 여러분이 되라고 존재의 의미와 긍정의 마음을 심어 주었다. 학생들 수업 시간 전 출석 호명에 이름을 풀이해 주면서 ‘너의 이름이 네 인생을 보여 주고 성품과 취향을 지니고 있다’ 고 말해 주곤 했다. 아이들도 많은 호응과 공감을 했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사회 관계망인 sns가 한창일 때 아이들과 새롭게 소통하려 카페와 블로그를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사용하는 아이디로 ‘ks 마크를 가진 하숙집 촌장’이라는 의미의 ‘ks****’,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부족하고 연약하고 부끄러운 죄인’의 뜻을 담은 또 다른 인격처럼 ‘per****’로 인터넷 여행을 즐겼다. 아이들과 함께 넓은 세상 속에서 보다 깊은 앎의 세계에 빠져 들면서.
정년퇴직 후에도 나는 주어진 이름대로 어느 터를 가더라도 빼어나고 솟아나려 열심이다. 전공을 잊지 못해 글쓰기를 하고 가끔 수필문학지에 글도 올리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거나 제자를 만나도 나는 ‘기수(基秀)’다. 만남이 어느 장소이든지 내 이름 뜻대로 존재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간다. 아직도 아내가 삼시 세끼 꼭 챙겨주는 덕을 톡톡히 보며 삶의 집터에서 ‘삼식이’ ‘家長’으로 건재하며 살고 있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둘째였던 나에게 아버지가 특별히 왜 이런 이름을 지어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형은 ‘길 永’ 동생은 ‘넓을 弘’, 난 빼어나 솟을 ‘秀’. 하긴 터에서 길게 빼어나게 넓게 형제들 의좋게 잘 살라고 지어 주셨을 것이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야 형제들의 우애가 남달라 길고 넓고 빼어나게 살아왔건만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 뿔뿔이 제 가정 챙기기에 급급한 상황이 되었다. 인생살이 언제나 즐겁고 기쁜 일만 있겠는가! 수개월이 지난 지금 코로나 19로 연락이 끊어질 정도로 ‘집콕’ 생활하기에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