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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Apr 03. 2022

#03 - 우연히 만난 천국

이븐 툴룬 모스크

여행 4일째, 2월 11일이 되었다


내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알렉산드리아로 넘어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숙소를 역 근처로 옮겼다. 이번에는 아고다에서 두 번째로 싼 싱글룸이었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에도 비록 바닥과 침대가 삐걱거렸지만 더운물 하나는 만족스럽게 펑펑 잘 나왔다. 나는 한여름에도 더운물로 샤워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 숙소를 구할 때의 따뜻한 물이 잘 나오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기차표를 사기 위해 카이로 역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알렉산드리아 가는 기차 편을 물으니까 저 옆에 다른 창구로 가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창구에서도 또 다른 창구로 가라고 했다. 이런 거로 스트레스받으면 지는 거다. 원래 여기는 이런 곳이다. 결국 네 번째 창구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기차표를 파는 것을 확인했다. 가장 빠른 시간의 기차표를 달라고 했는데 아침 10시 거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숙소를 옮겼나 싶었고, 2등석 10시 출발 기차표를 사야만 했다. 외국인에게는 기차표도 바가지를 씌운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는데 바가지 안 쓴 것 만으로 만족해야지 어쩌겠나.

이집트의 기차표는 이렇게 생겼다.

어제는 고대 이집트를 보았으니 오늘은 나름 최근의 유적을 보러 가기로 했다. 먼저 바빌론 성채로 갔다. 이건 고작 1700년밖에 안된 건축물이다. 참고로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바빌론 성채가 지어진 시간 간격보다 바빌론 성채 완공과 아이폰 발매의 시간 간격이 더 짧다. 한마디로 로마제국시대 때도 피라미드는 고대 유적이었던 거다. 그런 고로 이집트에서 바빌론 성채 정도면 최근의 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무너지긴 했지만 역시나 지어진지 얼마 안 돼서 새 건물 같아 보였다. 초기 기독교의 유물과 비잔틴 제국 시절의 기독교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도 있었다. 크기로만 보면 카이로 박물관의 1/5도 안되었지만 그 시절 벽화와 모자이크화가 내 취향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성화는 투박해 보일지언정 묵직한 맛이 있다. 바로 옆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당이 있었다. 나는 양초를 하나 사서 불을 붙여 바치며 기도했다.


바빌론 성채와 초기 기독교 성화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올해 계획하고 있는 일 다 잘되게 해 주세요.’


헌금도 하며 빌었으니 내 소원 정도는 들어주겠지.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다음 목적지인 이슬람 미술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그쪽 거리에는 마침 이슬람의 주일인 금요일이라 길거리에 돗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리는 카이로 시민들이 많았다. 이곳 사람들에게 종교는 곧 삶이다. 이방인인 나에게는 그저 신기해 보였다. 길을 따라 죽 늘어선 예배 행렬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조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이슬람 미술 작품은 참 예뻤지만 크게 관심을 끄는 건 없었다. 그런데 한국의 ‘Chun Hyang’ 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비석에 무슬림 라마단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소개를 해 놓은걸 발견했다. 근데 ‘Chun Hyang’ 대학교가 어디지? 찾아봐도 안 나왔다. ‘순천향 대학교’를 말하는 건가? 궁금한 건 못 참기에 한참 앉아서 검색해봤는데 결국 못 찾았다. 혹시 아시는 분 있음 댓글로 좀 달아주시면 감사드리겠다.


박물관을 나와 길에서 대충 코샤리를 사 먹었다. 코샤리는 밥, 마카로니, 렌즈콩을 쪄서 위에 토마토소스 같은 걸 끼얹어 먹는 이집트의 국밥 같은 존재이다. 가격도 싸다 한 끼에 10~15파운드(700~1200원) 면 뚝딱이다. 비주얼은 비록 잔반 같지만 맛도 꽤나 괜찮은 편이라 자주 사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성비 좋은 음식이 있다 보니 모든 음식의 가격을 코샤리로 환산하게 되었다. 양고기 샤와르마(전병에 싸 먹는 케밥 비슷한 거) 하나는 2 코샤리 , 피자 1인분은 5 코샤리 이렇게. 나는 먹는 거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편이라 삼시세끼 코샤리만 먹어도 크게 불만이 없기는 하지만 그곳만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틀에 한 번은 그럴싸한 식당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식사를 해 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혼자 여행을 다니면 이거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괜찮은 식당들은 기본적으로 둘 이상이 가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혼자 가서 막 이것저것 시켜서 반도 안 먹는 크레이지 리치 푸드파이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짓을 할 때마다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어린이가 자꾸 떠올라 차마 못하겠다. 게다가 난 그렇게 돈을 뿌리면서 이집트 경제에 기여할 만큼 리치 하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역시나 이번 여행에서의 식사도 맥도널드 -> 코샤리 -> 샌드위치의 반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틀에 한 번은 크레이지 리치 푸드파이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코샤리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이걸 돌아가며 먹는거다. 왼쪽부터 코샤리, 샤와르마. 샤와르마 사진은 제대로 찍은게 없어서 무료이미지 퍼옴.


다음 목적지는 그 유명한 살라딘이 지었다는 카이로 시타델로 정했다. 이집트에 오기 얼마 전에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을 보고 왔기에 꽤 기대가 되었다. 여긴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택시는 분명 바가지를 왕창 씌울 테니 우버를 탔다. 반 정도 왔는데 벌써 카이로 성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 지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이 나라의 오래된 건물들은 하나같이 거대해서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다. 나일강의 생산력은 어마어마했구나. 저런 건물을 마구 지어댈 수 있었다니. 그런데 막상 살라딘과 관련된 유물은 별로 없었다. 아니 그냥 카이로 시타델 내부에 별로 볼 게 없었다. 살라딘의 흔적을 보고 싶었으나 그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는 카이로 시타델의 주인이 너무 자주 바뀌었던 거 같다. 그렇다고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 시대의 분위기를 잘 재현해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생뚱맞게 성채 내부에 전쟁박물관이 있을 뿐. 게다가 이집트 최고의 랜드마크인 피라미드를 어제 봐버려서 감흥이 덜하기도 했던 거 같다. 여행지 최고의 랜드마크를 맨 처음 방문하는 건 이래서 지양해야 한다. 인도에 갔을 때도 그랬다. 타지마할을 처음 보고 나니 다른 건축물들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왔으니 구석구석 다녔다. 한 바퀴 보고 나오니 오후 네시였다. 딱 한 군데만 더 보고 이만 숙소에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카이로 시타델 맨 꼭대기에 있는 메흐메드 알리 모스크, 내부, 중동전쟁때 활약한 MIG-21

마침 숙소로 가는 길에 9세기 모스크 건축물의 걸작이라는 이븐 툴룬 모스크가 있었다. 우버를 타고 이동했다. 우버 기사가 길을 착각해서 자꾸 뱅뱅 돌고 있길래 정문의 반대쪽에서 내려서 모스크의 담벼락을 따라 걸어갔다. 쪽문을 지나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니하오를 박으며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저씨 : 너 모스크 보러 왔어? 여기로 들어가면 돼 입장료는 100파운드야.

나 : 어 나 카이로 패스 있어서 그냥 입장 가능해.

아저씨 : 카이로 패스로는 여기 못 들어가. 입장료를 내야 해


카이로 패스를 꺼내서  모스크의 입장료도 포함이 되어있는지를 확인했다. 정말로 입장 가능 리스트에 이븐 툴룬 모스크가 없는 거다. 그런데 여기는 정문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미심쩍었다. 이집트의 유적들은 보안상 출입구가 정문 한쪽으로만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 : 그럼 정문 쪽으로 가서 한번 물어보고 올게.

아저씨 : 저기까지 갈 필요 없어 여기로 들어가면 돼. 좋아 내가 50파운드에 입장하게 해 줄게. 넌 행운인 줄 알아.


느낌이 확실했다. 아니 세상천지에 입장료를 반값으로 할인해 준다는 게 어딨어. 이 아저씨도 사기꾼이다. 계속 나를 붙잡는 그를 뿌리치고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매표소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아서 정문 쪽에 가서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매표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무료라고 했다. 심지어 이집트의 모든 모스크는 무료라고 했다. 역시나 싸한 기분이 괜히 들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분도 여행하다가 문득 드는 싸한 기분을 절대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유전자에 각인되어 전해진 생존 프로그램 같은 거니까.


모스크에는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없지만, 다행히 관광객을 위한 신발 커버가 준비되어 있었다. 관리인은 신발 커버를 주면서 얼마든 상관없으니 알라와 모스크를 위해 기부를 해 달라고 했다. 10파운드를 주니 눈으로 나를 짠돌이라고 욕하는 거 같아서 10파운드를 더 줬다. 비로소 그는 웃으며 알라의 가호를 빌어주었다.


이븐 툴른 모스크에 들어서는 순간 고요함으로 가득 찬 새로운 공간이 열렸다. 바로 담벼락 하나를 두고 엉망진창 카이로 시내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정숙하고 고요했다. 숙소에 가는 길에 있길래 들렀을 뿐인데 작정하고 찾아간 비잔틴 성벽이나 카이로 시타델은 잊어버릴 정도로 인상적인 곳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홀리(holy)함이다. 아까 그리스 정교회 성당에서도 소원을 빌긴 했지만 그쪽보다 여기가 왠지 기도빨이 더 잘 먹힐 거 같았다.


넓은 경내를 천천히 걷다가 탑에도 올라갔다. 카이로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카이로 시내의 소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나가기가 싫었다. 하지만 해가 나일강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 넓고 사람도 없어서 숨어있어도 모를 거 같긴 했다. 나가면서 보니 한국어로 된 이슬람 소개 팸플릿을 무료로 배포하고 있었다. 하나 집어 들고 죽 훑어봤는데 번역도 이상하고 내용이 영 부실한 것이 차라리 나무 위키를 보는 편이 나아 보이긴 했다. 그래도 이곳에서 느낀 홀리한 기분을 담아가는 의식으로 하나 챙겨 왔다. 나는 카이로 시내에서 단 한 군데만 갈 수 있다면 이븐 툴른 모스크를 고를 테다. 참고로 피라미드는 카이로 시내에 있는 게 아니니 제외.

Holy 이븐 툴룬 모스크와 첨탑. 저 첨탑이 풍경맛집이다.
 태극기와 북한의 인공기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이집트는 북한이랑 더 친했다고 한다. 저 인공기는 북한에 대한 이집트의 마지막 의리인가.
첨탑위에서 본 카이로 시내. 저 멀리 카이로시타델도 보인다.



샤와르마(케밥의 이집트 버전)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매연과 먼지로 가득한 카이로 시내를 삼만 걸음 가까이 걸었더니 목이 영 칼칼했다. 오늘은 카이로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카이로는 몹시 다이내믹한 재미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만큼 체력소모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얼른 볼 거 다 보고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만있어도 체력소모가 되는 도시다 보니 힘들었나 보다. 여기는 너무 볼게 많아서 고작 3~4일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다음번에 카이로만 한 2주 정도 잡고 제대로 한번 털어봐야겠다.


알렉산드리아는 도시가 비교적 차분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고 들었다. 또,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바다가 그렇게 예쁘단다. '알렉산드리아'라니. 알렉'산'드리아라고 '산'에 강세를 줘서 발음하면 꼭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기분이 드는 게 어감이 참 좋다. 몹시 기대가 된다. 알렉산드리아에 꼭 가고 싶은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중학생 때 성적을 갈아 넣으며 한 게임인 대항해시대 2에서는 나일강 탐사를 가기 위해 꼭 들러야만 하는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나일강 탐사는 게임 초~중반에 필수적으로 하게 되는 코스라 정말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도시다. 게임상에서 알렉산드리아에 갈 때마다 이곳은 실제로는 어떤 곳일까 수차례 상상했다. 대항해시대를 밤새 플레이하고 있던  중학교 2학년 때의 나를 만나서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


“너는 약 25년쯤 후에 저 도시에 실제로 간단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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