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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라쵸이 Sep 25. 2021

2030 밀레니얼 아티스트 인터뷰 시리즈 (일곱번째)

2021년 9월 - 권하형 (Kwon Hahyung), 1989

< 진심의 렌즈 안에 자신만의 고향을 담아내는 작가 - 권하형 >



진심(眞心)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 그리고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를 뜻한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유한 특성, 개성을 가지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각자가 삶을 마주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우리는 종종 소통의 과정에서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워 관계를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진심은 통한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진심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잠수종과 나비’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에 걸려 그의 주변인들과 소통의 어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이 아픈 상황은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환경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불편함 앞에서도 서툴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대한다. 분명 서툴지만, 그들의 바탕에는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진심이 있었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은 서로를 향한 진심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진심은 통하는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언젠가는 상대에게 전해지기 마련이기에 우리는 살면서 한 번씩은 ‘진심은 통한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 우리가 만날 작가 권하형은 모든 것에 진심이다. 단어 하나, 표정 하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그녀는 매 순간에 마음을 다한다. 그런 그녀가 가진 진심의 렌즈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들과 결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을 순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그녀가 사진을 통해 전하는 진심의 시선 끝에는 우리 모두가 엄마의 품과 같은 따뜻함을 느끼는 고향이 있다. 언제나 나를 품어줄 것 같은 편안함을 전하며, 내 마음을 다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 자체로 안아줄 것만 같은 고향과 같은 따뜻함을 담아내는 그녀의 작업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선물한다. 오늘은 좋은 사람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작가 권하형이 전하는 진심을 함께 알아보자.



<젊은시각 새로운 시선 2020-낯선 곳에 선> @부산시립미술관, 20.07.20 / 출처: 권하형 작가




Q. 안녕하세요 권하형 작가님, 저희 독자분들께 작가님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주로 사진 매체로 작업하는 권하형입니다.




Q. 주로 사진 매체로 작업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 주셨어요. 사진이라는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요?


아, 사실 제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사진을 좋아하게 된 지점을 말씀드려야 할지 혹은 제가 사진을 전공하였는데 전공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려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이 조금 생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다 이 에피소드를 전해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현재 부산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산이라는 도시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신 기획자분이 한 분 계시는데요. 그분께서 최근 제게 “하형쌤 변했네요?”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사실 그 말이 굉장히 놀라웠어요. 왜냐하면, 제 성격이 다소 보수적이라서 저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예를 들면, 식당이 10곳 있으면 저는 그중에서 1곳의 식당만을 가고 그 식당의 메뉴 중에서도 1가지 메뉴만을 반복해서 먹는 성격이에요. 다시 말해서 모험이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성향이기보다는 지향하는 바가 한결같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저 자신도 최대한 제 태도가 일관되길 바라는 사람인데, 이 기획자 선생님께서 제가 변했다고 이야기해주시니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왜요?”라고 제가 여쭤보니, 이분께서 1년 전만 해도 제 삶의 테두리 안에서는 작업자로 살아갈 것이라는 영역이 뚜렷하지 않아 보였는데 지금은 삶의 중심이 작업자의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바뀐 태도로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게 보인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졸업작품 이후에 10년 동안 개인 작업이 안 나와서, 어떻게 보면 저는 저 자신을 생계 유지형 작업자라고 생각하면서 작업자가 제 삶의 중심이 아닌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고수했거든요. 그 당시에는 삶을 영위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밖의 남는 시간을 작업에 쏟는 방식으로 삶을 마주했다면 최근에는 작업하기 위해서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삶으로 작업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작업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으로 바뀐 거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최근 사진을 대하는 제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말씀과 함께 작업을 대하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제 고향 창원에 내려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저 자신이 작아지는 삶을 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런 와중에도 사진은 놓이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최근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후, 저 자신이 변화한 모습을 타인이 발견하고 말해주었는데 그 모습이 마음에 든 경우가 처음이라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Q. 와, 우문현답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작가님의 사진에 대한 진심 그리고 작업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야기네요. 무엇보다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고향에 오셔서 작가님 자신이 작아지는 삶을 사는 와중에도 사진이 놓이지 않았다고 말씀 주셨는데요. 사진이라는 매체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으셨을까요?


앞서 대학교 때 사진을 전공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사실 처음부터 사진이 너무 좋아서 전공을 사진으로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원래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청소년기 내내 영화를 공부했어요. 다만, 영화라는 매체는 작업 과정 자체가 단체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늘 영화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면 사람이 없고 자동차만 달리는 도로 위에서 홀로 소리치고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 촬영을 하다 보면 어떤 부분들이 계속 신경 쓰이는데 그 부분을 저 혼자서 조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보니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아요.


대학 입학을 준비하면서, 당연히 대학에서도 영화를 전공하게 될 줄 알았는데 당시 성적으로는 영화과에 입학이 어려워서 성적에 맞춰서 하게 된 공부가 사진이었어요. 처음 사진을 전공으로 선택했을 때는 제가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당시 저는 사진이랑 영화랑 비슷한 줄 알고 사진 전공을 택했는데, 막상 입학하고 나서 보니 과에서 카메라가 없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거든요. 당시 같이 입학했던 친구들은 다들 이미 예술고등학교에서 사진 과를 졸업하고 온 친구들이 많아서 사진에 대한 기본기는 익히고 왔던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친구들이 기본기도 가르쳐주고,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준 덕분에 공부를 잘 마쳐서 지금도 그때의 고마움이 많이 남아 있어요.


대학교 1학년 때 암실 수업을 들으면서 일주일 밤을 새웠던 기억 이후로 전공으로 사진을 선택한 것이 제가 한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아직도 그날, 그 순간이 생생히 기억나는데요. 그 날의 새벽 하늘 색깔이 어땠는지, 그 풍경, 온도, 심지어 기숙사 경비실 아저씨의 얼굴까지 모든 게 기억나는 날이에요. 당시 기숙사가 아침 6시에 문을 열어줘서, 저는 암실에서 과제를 하면서 날을 새고 기숙사에 걸어가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거든요. 그때 엄마에게 “엄마, 내가 이렇게 공부하느라 일주일을 밤새웠는데 공부가 너무 재밌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내가 선택한 전공 공부를 하는 즐거움을 그때 처음 느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에게 사진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사진은 혼자 하는 작업이다 보니, 힘든 것도 저 혼자서만 끙끙 앓고 노력하다 보면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는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비록 시작은 영화랑 비슷할 줄 알고 했던 바보 같은 선택이었지만, 사진은 제가 한 ‘최고의 선택’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키나와시 풍경, 오키나와 , 2016 / 출처: 권하형 작가


Q. 좋아하는 일에 관해 설명하실 때 작가님의 표정이 너무나 좋네요. 사진이라는 ‘최고의 선택’과 함께 멋진 작업을 해주신 덕에 이렇게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어서 저도 사진에 고마움이 느껴집니다.


제가 인터뷰 전에 작가님 소개 글을 보았는데요. 타지에서 오랜 기간 생활하시다가 고향 창원으로 돌아오게 되셨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얼마 동안 지내셨는지, 그리고 타지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있으신지 궁금해요.


대학교 입학 전에는 창원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대학생 때는 학교가 천안에 있어서 공부하는 4년은 천안에 있었고, 그 이외에 휴학 시절 그리고 졸업 이후에는 6년 정도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저 그런데, 제가 어떤 말을 내뱉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하는 성격인데요. 제 친구 중 한 명이 저를 표현할 때 “하형이는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너무 두드려서 돌멩이가 푹 꺼져서 돌이 없어졌을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생각과 걱정이 많은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사실 정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모든 순간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기억에 남아서요. 왜 우리가 주변에서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안부 인사라 생각하고 너무 쉽게 하는데, 생각해보면 이 말도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장애가 있으신 분들께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처럼 저는 제가 상대방의 예민함과 섬세함을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뢰 찾기 게임을 하면 고급 단계에 갈수록 더 신중하고 조심해져야 하는 것처럼, 상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이게 불쌍히나 연민의 감정이 아닌 편하게 연대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선택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순간 하나하나가 다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고 답변 드리고 싶습니다.  


도구치 해변, 오키나와 , 2016 / 출처: 권하형 작가



Q. 그렇군요. 작가님의 삶 속에는 작가님을 아끼는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시는 것 같아요. 앞서 말씀 주셨던 기획자분, 어머니, 그리고 작가님의 신중함을 이해해주는 친구분까지 정말 많은 분들께서 작가님 곁에 자리하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대신 그때 당시 작가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을지는 상상이 되시나요?


제가 부산 시립 미술관 전시를 준비하면서, 너무 힘들어했을 때 제 친구 ‘쑴’이 제게 적어준 글이 있어요. 저랑 3살 차이가 나는 언니로 책 ‘애매한 재능’을 집필하신 작가인데, 그 친구가 해준 말들이 제게는 항상 큰 위안이 돼요.


제 가족들은 저를 조금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지점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쉽게 감동하고 또 쉽게 상처받는 성격이다 보니, “울지마. 왜 또 울어. 왜 너무 쉽게 감동하고 상처를 받니. 하형이는 왜 중간이 없니.”라는 걱정을 하거든요. 그런데 쑴은 제가 다른 사람들과 맞춰 바뀌려고 애쓸 때, 이런 제 모습이 제 장점이라고 말해준 친구입니다. “하형아, 나는 네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쉽게 감동하는 성격이 네 장점이라고 생각해. 아무나 공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또 어른이 되어가면 갈수록 감정이라는 기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누구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도 네 능력인 거야.”라고 말해줬을 때 저도 처음으로 ‘아, 이게 내 강점이구나! 남들이 가지지 않는 능력이었구나.’ 라는걸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쑴이 제게 해준 또 다른 한 마디가 “하형아, 너는 카메라를 통해 무언가를 바라볼 때 미소 짓고 있구나.”라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무언가를 바라볼 때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몰랐거든요. 저는 제가 찌푸리고 있는 표정이 더 많으리라 생각했었어요. 왜냐하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제 표정을 보지를 못 했던 것 같거든요. 특히, 요즘에는 줌(ZOOM)을 통해서 강의나 미팅을 많이 하게 되는데, 화상 카메라로 미팅을 하면서 사람들이 “하형아 너는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어?”라는 질문을 종종 받게 돼요. 그래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관찰할 때 내가 담아내고 싶어 하는 장면을 바라볼 때 웃고 있나 보다.’라는 새로운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 사진을 볼 때 ‘따뜻하다’라고 바라봐주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 결을 조금 바꿔보는 게 제 숙제이기도 하지만, 저는 제 삶의 태도가 제 작업과 동일 시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항상 일치되는 지점을 생각해요. 그래서 제 사진도 제 삶의 태도와 일관된 사진이 계속 나오는 것으라 생각하고, 아마 그런 의미에서 지난 시절의 저를 돌아봐도 줌 미팅에서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제 모습이 사진에 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젊은시각 새로운 시선 2020-낯선 곳에 선>, @부산시립미술관, 20.07.20 / 출처: 권하형 작가




Q. 사진뿐만 아니라, 답변에서도 작가님께서 말씀 주시는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사진 만큼이나 따뜻한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런데 타지 생활을 하시던 중, 고향 창원으로 돌아가게 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어떤 마음이 작가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던 건지 이야기 나눠주실 수 있으실까요?
 

돌이켜보면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저는 4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저는 그 고민을 4년 정도 했던 게 내려오기 싫어서가 아니라, 막상 내려오려 하니 겁이 나서 버티고 버티다가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행동으로 옮기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서울에 살던 당시, 가장 친한 고향 친구의 집에서 지냈었거든요. 아까 말씀 주셨던 대로 저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정말 많아요. 당시 이 친구가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친구였는데, 그때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던 제게 그 친구가 자기 집에서 머물면서 월세를 내는 형태로 같이 살자고 먼저 제안해 줬는데, 저는 그 친구의 집에서 함께 지냈지만 실제로 월세는 몇 번 낸 적이 없어요. 당시 그 친구도 힘들게 대학원 생활을 하고 취업 준비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이 친구가 마침내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 거예요. 너무나 축하하는 마음을 갖는 게 당연하고, 저 또한 너무 기뻐서 축하하는 마음이 컸는데 동시에 제가 그날 김밥 한 줄을 먹고 체했거든요. 이게 정말 양가적인 감정이 생겼던 게 그 친구가 취직한 것은 너무나 축하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동시에 이 친구가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직장 근처로 집을 옮기게 되면 제가 거기까지 따라가서 지낼 수는 없다 보니 걱정이 생기는 마음도 있었거든요. 물론, 한참 지나서 이 친구에게 사과는 했지만, 가난과 궁핍 때문에 내가 내 주변 사람을 축하해 줘야 하는데 진심으로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저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아무리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을 살면서 굳이 서울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다 결국 내려오게 된 거죠.





Q. 그렇군요. 막상 내려오시기로 결심하셨을 때 두려움과 걱정이 크셨을 것 같은데 그래도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신 것 같아요.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시작은 친구였는데, 마지막에 딱 마음을 먹고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 덕분이었어요.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엄마가 제게 해주시던 말씀이 “하고 싶은 것 다 해도 된다. 하고 싶은걸 하면 돈은 쫓아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대신에 뭐든 할꺼면 정말 그 일에 미쳐라. 미친듯이 해야한다.” 라고 해주셨거든요.



저는 사실 그 말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당시 저는 그 정도까지 사진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막상 엄마는 제가 졸업을 한 뒤에 바로 취업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제가 작가가 되겠다고 말을 했을 때 집안 형편이 제 결정을 지지해 주지 못할 형편이라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도 마지막에 엄마가 제게 해주신 말씀이 “하형아, 너한테는 첫 번째도 엄마가 아니어야 하고, 두 번째도 엄마가 아니어야 된다. 첫 번째도 사진, 두 번째도 사진이어야 한다.”라고 해주셨거든요. 제게는 엄마가 큰 사람이라서 당시 제가 창원에 내려오게 되면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엄마를 위한 삶을 살게 될까 봐 걱정이 있었는데, 결국 제가 첫 번째가 될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었을 때 창원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엄마는 창원에 계시고, 저는 부산에서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죠.


가데나 공군기지, 오키나와 , 2016 / 출처: 권하형 작가



Q.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셨을 때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사실 저도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 서울이 아니다 보니 명절 때나 가끔 부모님을 뵙기 위해 고향에 내려갈 때가 있는데 오랜만에 간 고향이 가끔 낯설다고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제가 평소에 말이 느린 편이라서, 택시를 타게 되면 마음이 조급해져요. 특히, 목적지를 말씀드릴 때 저희 아버지 세대의 기사님들께는 빨리 목적지를 말씀드려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서 택시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제가 태어난 아파트에 가야 하는데 지금은 그곳이 사라져서 그 위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던 날이 있어요. 막상 택시를 탔는데 지금은 그 장소가 없어졌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는 동안 택시 아저씨는 짜증을 내시는데 그때 제가 “기사님, 창원 백화점으로 가주세요”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저는 그날 그 기사님을 처음 뵀고, 앞으로도 뵙지 않을 분인데 그분이 “하이고마, 우리 아가씨 오래된 사람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창원 백화점 모른다.”라고 하시면서 저를 어떤 장소에 내려주셨는데 그 장소가 정확히 제가 말했던 곳이었어요.


제가 내리자마자 창원 백화점을 내비게이션에 검색해 보았는데, 내비게이션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인 거예요. 그 때 제 자신에게 ‘그래. 여기 네 고향 맞다. 여기 있어도 괜찮다.’ 라는 말을 하게 되었어요. 뭔가 여기가 제 고향이 맞다고 누가 증명해 주지 않아도 정서적 공감과 기억의 공유를 통해서 누군가와 교감이 될 때 있잖아요. 그때 GPS 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여기가 제 고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부터 고향을 그려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고향이 낯설게 느껴진 이유가 단순히 건물이 변해서 도시의 모습이 제가 살던 것과 달라져서가 아니라 제 삶이 거기에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린 시절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다 서울에 가 있고, 그 이후에 작업에 대한 고민과 같은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다 서울에 있어서 창원에는 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게 창원이라는 물리적 고향에 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제 고향이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던 거였더라고요.



기노완시 풍경, 오키나와 , 2016 / 출처: 권하형 작가




Q. 아,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결국에는 고향이라는 게 단순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공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서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안식처이자 나라는 사람의 깊은 내면까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편안함을 가진 곳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작가님께는 현재 지도에 나타난 지형적 공간이 아닌, 작가님 개인의 정서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작가님만의 ‘정서적 고향’은 어디일까요?


제가 타지 생활을 하다가 고향 창원으로 돌아와서 집에 왔을 때, 저희 집이 이사를 했었거든요. 지금 저희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인데, 이 집이 창원 외곽지역에 있어서 GPS 상에 나오지도 않고 개인 차량이 아니면 가기 힘든 곳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집에 가면, 제가 유년 시절에 살던 곳도 아니고 대학교 이후 이사를 가서 제가 서울에 있는 동안에 부모님이 사시던 집인데도 저는 그 장소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냥 쉴 수 있는 집이라서가 아니라 엄마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벗어난지도 #1›, 2020 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279×419cm / 출처: 권하형 작가



그러면서 저에게 고향은 창원이라는 집이 아니고,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형태도 아니고, 엄마가 있는 곳이 제 고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저는 엄마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거든요. 2017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그때는 제가 서울에 있을 때인데, 그날 영화를 보러 대구까지 갔었어요. 그리고 돌아오는 휴게소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나 영화 보러 대구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어.”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나도 오늘 대구 섬유시장에 다녀왔는데”라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같은 날 각자 대구에 갔던 건데 이런 식으로 엄마랑 저랑 닮은 점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좋아서 멈칫하게 되는 장면들은 무언가에 끌리게 되기 때문에 멈칫하게 되는 것일 텐데 그 정서들은 학습하지 않아도 엄마에게서 자연스레 제게 전달되어 온 정서라고 생각하거든요. 학습하지 않아도 제가 멈칫하게 되는 풍경과 저희 엄마가 멈칫하는 풍경이 닮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엄마가 제 정서적 고향인 게 너무 뚜렷하고 분명하지만 고향은 고향일 뿐 정착지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은 여전히 돌아가면 따뜻한 곳인 건 당연한 거고, 대신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공간과 그 이후의 행보를 위해 살아가는 게 제 삶이라고 생각하며 이번 작업을 잘 하고 있습니다.  


‹벗어난지도 #2›, 2020 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166×110cm / 출처: 권하형 작가



Q. 작가님께서 작업을 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또는 작가님만의 작업을 임할 때 가지는 생각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좋은 사람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요.



후텐마 해병대 항공기지, 오키나와 , 2016 / 출처: 권하형

 


Q. 와, 작가님의 작업에 대한 진심이 또 한 번 느껴지는 말이네요. 그렇다면, 올해 저희 독자분들이 작가님의 좋은 작업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2021년 하반기 작가님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올 하반기에는 총 3번의 전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현재 부산 40계단 윈도우 갤러리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 전시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또 KT&G 상상마당 춘천의 <10100 : 10년을 기억하고, 100년을 상상하다> 전시에 참여 중인데요. 9월 27일부터 10월 10일까지는 부산 KT&G 상상마당에서 해당 전시가 계속 이어질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산 원도심에서 저를 포함한 3명의 작가들과 함께 <Living next door to artists> 전시를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산 원도심 오픈스페이스 배에서 진행될 이 전시는 10월 8일부터 11월 10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며 매주 1회 오픈 스튜디오와 아티스트 토크 등이 진행될 예정이니, 하반기에 있을 다양한 소식들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벗어난지도 #8›, 2020 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 152×100cm / 출처: 권하형 작가




Q.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작가님은 어떤 행보를 걷고 있을까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늘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날이 온다면, 아티스트 ‘권하형’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요?


제가 08 학번인데, 2017년 10월 즈음 창원에 내려왔어요. 다시 창원으로 내려왔을 때, 제가 금의환향이 아닌 작아진 상태에서 내려왔었고 그 당시 10년만 더 해보자는 마음가짐이었어요. 그런데 2018년이 되어도, 2019년이 되어도 잘되지 않아서 이제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을 때, 창원의 친구가 “너의 10년 목표를 꼭 학교 입학연도 기준으로 세워야 하나? 졸업 연도로 기준만 바꾸면 되지 않나?” 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때부터 다시라는 생각으로, 10년 채우면 또 그때부터 또다시 그리고 계속 지금부터 다시 10년이 시작되었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아마 10년 뒤에도 저는 계속해서 작업을 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때의 제게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처럼 계속 작업을 놓지 않는 작가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남들이 뭐라고 불러도 너의 눈에 안 보이고 너의 귀에 안 들리게 살아가도 좋아.”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작가 권하형은
 ‘좋은 사람이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 라고 믿습니다."






권하형 (KWON HA HYUNG), 1989-

부산에서 활동


권하형(b.1989)은 별수 없는 것들이 너무 별수 없이 당연하 듯 지나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어찌해야할지 애써 시간을 들이고 있다.




전시연혁


개인전

2019 <여름사이> 로그캠프, 창원


단체전

2021 <Living next door to artists> 오픈스페이스 배, 부산 (예정)
2021 <10100 : 10년을 기억하고, 100년을 상상하다> KT&G 상상마당 홍대,춘천,부산 (진행중)
2021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 523 쿤스트독, 부산 / 가볍고 복잡한(갤러리카페) (진행중)

2020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0 - 낯선곳에선>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9 <사건이발생했다> 스페이스산호, 제주
2019 <모두가 사월의 바다와 닿아있다> 공간 힘, 부산 / 생각하는 바다, 부산
2018 <경기,아카이브> 경기상상캠퍼스, 수원
2016 <오키나와, 한국 - 같은 싸움> 갤러리 라파예트, 일본
2016 <사월의 동행>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4 <4시간16분 무빙전시회> 국회에서 광화문까지
2014 <노인정프로젝트> 용문면 덕촌2리 마을회관


프로젝트 및 기타

2020~2021 [영도리서치] 공공예술프로젝트
2013~2017 [빛에 빚지다]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달력 프로젝트 2016 [밀양, 10년의 빛 - 사진으로 보는 밀양 송전탑 투쟁] 사진집 출판 2014~2016 [아이들의 방]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Contact

이메일_ phosngraphos@naver.com

인스타그램_ @kwonhah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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