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 요요진 (YOYOJIN), 1984
인간은 예로부터 생각하는 동물이라 불려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과 고민이 모여 탄생한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모든 철학의 시작은 '나'에게 주목하고, '나'에게 질문하며 이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또 '나'를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마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이야기했던 그 말의 정답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한 번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나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자기 관찰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요요진(YOYOJIN)’의 삶 속에는 그 누구보다 ‘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의 이야기와 그 고민 끝에 찾아낸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 그리고 ‘나’는 어떤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그려온 그의 인생이라는 캔버스에는 겹겹이 쌓아 올린 고민의 흔적이 빼곡히 담겨있다. 멀리서 보면, 그만의 고유한 귀여운 캐릭터들이 가득 찬 그의 작업에는 선하나, 색깔 하나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넘기지 않는 그의 생각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이라는 방식을 통해 표현하고, 자신의 경험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함께 느끼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작가 요요진의 삶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는지 함께 알아보자.
Q. 안녕하세요 요요진 작가님, 8월 인터뷰 주인공으로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요요진 작가고요, 그림 그리고 있습니다.
Q. 제가 인터뷰 섭외 때부터 꼭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요. ‘요요진’ 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지가 정말 궁금했습니다. 장난감 요요에서 얻은 이름인 걸까? 하는 호기심이 계속 생겼거든요. (웃음)
요요진이라는 이름은 제가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살면서 갖게 된 이름입니다. 제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살았었는데, 맨 처음 잠비아에 도착했을 때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어요. 당시 영어가 편하지 않다 보니, 친구들을 사귀는데 어려움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다 조금 위트있게 다가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요, 와썹! (Yo, What’s up!)” 이라고 하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쑥스럽기도 했지만, 조금씩 친구들과 이 인사를 통해 가까워지니까 나중에는 잠비아 친구들이 먼저 “너는 앞으로 요요진이라고 부를게” 라고 하면서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아, 끝에 진이 붙은 건 제 본명이 임효진인데 당시 영어 이름으로 ‘진(Jin)’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서 자연스레 요요진이 되었습니다.
Q. 아하, 그렇군요! 요요진이라는 이름이 잠비아 친구들이 지어준 애칭에서 시작된 이름이었네요. 이름이 굉장히 인상 깊다고 느껴졌는데, 이런 스토리가 있는 이름일 줄을 몰랐어요. 기억에 잘 남는 이름인 것 같고, 작가님과도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아요.
하하. 잘 어울린다고 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Q. 아까 자기소개에서 그림 그리고 있다고 말씀 주셨어요. 작가님 포트폴리오를 보면, 8살부터 드로잉을 시작하셔서 쭉 그림을 그리고 계시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어린 나이부터 꿈꿔온 삶을 계속 이어오고 계시는데요. 그림 그리는 것의 어떤 매력이 작가님을 계속 그리게 했던 걸까요?
8살 때를 생각해보면 사실 시작은 대부분의 사람과 비슷할 겁니다. 우리 어릴 때 어머니 등에 떠밀려서 한 번씩은 다들 미술 학원에 가본 경험이 있잖아요. 저도 그때 처음 드로잉을 경험했었는데, 처음 미술학원에 갔을 때 선생님이 연필 드로잉을 시키면서 신문지에 있는 농구선수가 골을 넣는 장면을 그려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당시 제가 많은 고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도화지에 연필로 쑥쑥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제가 봐도 ‘어? 이 정도면 괜찮은데?’ 하는 느낌이 있었고, 그때 ‘아,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자신감이 붙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던게 기억에 남습니다.
Q.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고나니, 8살의 작가님이 그리셨던 작업도 궁금해지네요.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감이 붙을 수 있는 그림이라면 왠지 엄청난 그림일 것 같아요. 그러면, 현재 두들 스타일로 작업을 해오고 계시는데 해당 그림 스타일은 어린 시절부터 쭉 그려왔던 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일까요?
아, 두들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던 시작은 초등학교 3, 4학년 시절로 돌아갑니다. 당시 그림을 잘 그리던 친구 중 한 명이 제게 토마토 캐릭터를 선물해줬어요. 제가 사실 사람들에게 저 자신을 막 내세워서 ‘저는 이런 걸 잘해요!’라고 막 앞에 나서는 것을 잘 못 하거든요. 그런데 또 제가 뭔가를 잘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항상 있는데, 어릴 때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 때도 부끄러움을 많이 탔는데, 부끄러우면 얼굴이 빨개지는 제 모습을 보면서 토마토가 제 캐릭터가 된거죠. 그때부터 토마토 캐릭터를 중심으로 뭔가를 막 쌓아 올리고, 어떤 행성들도 그리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더해가는 두들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는데 친구들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면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내가 그렸어!”라고 하면 친구들이 놀라면서 “야, 너는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을 해줄 때 자신감이 더 커졌고 그렇게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게 된 거죠.
Q. 와, 작가님 작업의 배경을 가득 채운 다양한 선과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는 작가님만의 스타일을 토대로 꾸준히 작가님만의 세계를 구축해오신 거네요. 작가님 포트폴리오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작품 <MAKISHI, 2018> 이라는 작품 설명에 따르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아프리카 대륙으로 떠나는 것을 결심하셨다는 내용이 있어요. 많은 대륙 중 아프리카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제가 아프리카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때는 20대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하는 일이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과 제가 타인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나중에 큰돈을 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마치 제가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꿈을 꿨던 것 같습니다. 위인전 같은 책들을 읽어보면, 그들이 어떤 영웅적 행위를 하면, 그 결과가 세상을 바꾸고 성공하게 되는 그런 삶들이 기록되어 있잖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꿨던 것 같습니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당시 제가 생각하는 ‘멋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해 고민을 했었죠. 그리고 제가 관심 있는 애니메이션 그리고 영상 제작 활동을 하면서, 예술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멋있는 사람을 정의했습니다. 또, 거기에 해외라는 키워드가 붙는다면 더 매력적이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30대까지는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에 집중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30대에 다양한 경험을 해두면, 그 뒤로는 세상이 나를 위해 닦아놓은 평탄한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레, 아프리카를 떠올리고 아프리카의 문제인 에이즈 관련된 수많은 기관들이 필요로 할 콘텐츠를 제공해주면 미디어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보람을 느꼈어요. 그리고 실제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캐릭터 제작과 영상 제작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던 중, 한국 유네스코 파견 활동을 지원하고 제가 꿈꾸던 삶을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된 거죠.
Q.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다.’라는 말이 딱 떠오르는 이야기네요. 작가님의 이야기는 20대 청년의 막연한 꿈 이야기라기보다는 굉장히 구체적으로 계획된 삶의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그러다 보니까, 유네스코 파견 활동이라는 멋진 기회가 주인을 찾아왔던 게 아닐까요? (웃음)
그런가요? (웃음)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뭔가 착착 맞아떨어진 포인트들이 있었던 거죠.
Q. 그럼요. 계속해서 고민하시고, 그 꿈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신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 기회가 내게 왔을 때 ‘어! 이거 무조건 잡아야 한다!’ 라는 선택을 하는 것 또한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시고 뜻하셨던 것이 있으니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멋지네요! 그러면, 4년 동안 유네스코 활동 당시 진행했던 SOLOBONI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미디어 콘텐츠를 전공했습니다. 제게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면서 개안을 하게 하는 활동이예요. 미디어에는 시각, 청각, 사회적 분위기, 정치적 영향 등 정말 다양한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상업 광고는 미디어로서 사람들에게 구매라는 행위를 유도하기 위해서 최대한 매력적인 콘텐츠로 사람들은 현혹하잖아요. 그런가 하면, 공익 광고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활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미디어 콘텐츠라고 볼 수 있죠. 솔로본 문화 예술 프로젝트는 이런 미디어 콘텐츠를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게 하고 그들 자신이 목소리를 낼 힘을 실어주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시, 마을 청년들뿐만 아니라 마을의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영화라는 콘텐츠를 같이 만들면서 그들의 일상을 담아낼 수 있도록 했어요. 일상을 미디어에 담아내면서, 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결국 마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미디어 운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잠비아의 솔로본 마을은 공장 지대인데, 전국에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모여든 정착촌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소위 말해 슬럼이라 불리는 도시이다 보니 거주 환경이 좋지 않고 위생 문제와 실업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유럽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공장이 문을 닫고 청년 실업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거죠. 그러면서 사람들이 경제 활동을 하기 힘들어지고, 결국 고립되게 됩니다. 고립된 청년들은 약이나 술로 인한 알코올 중독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 문화 프로젝트를 이들에게 제안하면 마을 사람들이 취미 활동을 통해 삶이 개선될 것이라 믿었어요. 그들의 삶이 있고 공간이 있는 곳에 그들의 삶이 조금 더 풍족해지는 취미 활동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카메라를 하나씩 쥐여주고, 영화를 찍게 하고, 영화를 찍고 나서는 CD로 만들어서 판매하고 경제적 이익까지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Q. 아, 그렇군요! 문화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시도였네요. 예술의 사회적 가치가 잘 담긴 프로젝트였던 것 같아요. 그럼 사람들이 영화를 찍고 만들어서 실제 취업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프로젝트 마무리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당시에는 문제 해결이라는 큰 꿈을 꾸고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나, 실질적으로 경제활동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그 친구들에게 취미 생활을 준 것은 맞지만, 영화라는 게 그냥 개인적인 수준에서 CD를 제작해서 직접적으로 판매를 한다는 거 자체가 계속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잖아요. 요즘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수익화를 실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시 만들었던 콘텐트 자체가 대중성을 휘어잡을 수 있는 콘텐츠도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그만큼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어서 그들의 삶에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당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 영상 편집 기술을 익힌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영상 편집 활동 자체를 비즈니스로 만들고, 현지 결혼식이나 정부 행사 같은 곳에 참여해서 영상 촬영하고 편집해서 납품해주는 형태로 수익화를 만든 친구도 있기는 해요. 그 친구는 지금도 자기 사업을 계속해서 자기만의 스튜디오랑 가게도 만들었죠.
Q. 와, 모두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작가님의 시도가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준 기회가 되었네요. 멋져요. 그 후에는 아티스트 그룹 ‘ART4ART’의 소속 작가로도 활동하시며, HIV/AIDS의 올바른 정보 전달과 사회적 인식개선을 위한 다큐멘터리와 TV 방영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셨는데요. 이 프로젝트도 소개 부탁드려요.
‘ART4ART’ 프로젝트는 주말에 하던 활동이었습니다. 주말이면 제가 활동하던 지역(카퓨에)에서 수도(루사카)로 나와서 종종 쉬는시간을 가졌어요. 그런 와중에도 예술계에 종사하고 계시는 다른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스튜디오에 찾아가새롭게 만난 친구 중 한 명이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바로 ‘ART4ART’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시 아이언맨 영화가 처음 개봉하면서 엄청난 열풍을 끌던 시기였는데,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잠비아의 슈퍼히어로를 만들고 잠비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해주는 아이콘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잠비아에는 HIV/AIDS로 되게 우울하고, 살아있지만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하나의 희망의 아이콘을 만들어주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래서 약 8m 정도 되는 조각상을 만들어서 그 조각을 도시에서 잘 보이는 곳에 위치시키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구성했죠.
저는 그 과정을 촬영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했어요. 이런 의미 있는 활동이 콘텐츠화된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서 이 조각상이 어떻게 제작되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3분에서 5분 정도 되는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기록을 남긴 거죠. 그런데 그러다 보니 제 스스로 ‘어? 나는 캐릭터 작업을 하고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Q. 그러게요. 계속해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이때는 그림보다는 영상 관련된 활동을 더 많이 하셨던 것 같네요. 당시 이 생각이 떠올랐을 때 어떻게 하셨나요?
그때도 곰곰이 생각을 했었어요. 제가 아프리카에 갔던 이유가 HIV/AIDS 관련된 내용으로 의미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이유도 한 가지 있었거든요. 그리고 마침 이것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제가 팀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니, 지금 조각상을 만드는 컨셉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거죠.
그래서 탄생한 애니메이션이 안티 레트로바이럴맨 (Anti Retroviral Man)이라는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HIV 바이러스에 걸리면, 이 바이러스가 사람들 몸 구석구석에 퍼지면서 면역 체계를 망가뜨립니다. 그러면서 이 바이러스가 감기 또는 독감과 같은 병의 합병증을 유발하게 되는데 면역 체계가 무너져 있으니까 이로 인해 에이즈라는 병이 발생하는 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병은 일단 치료제가 없어요. 대신 치료제가 없지만, 이 바이러스가 활동하지 못하게 잠재우는 약이 안티 레트로 바이럴 트리트먼트로, 이 알약을 매일 같은 시간에 복용해주면 HIV 바이러스가 잠을 자게 해줍니다. 근데 잠비아 사회 내에서는 '이 알약을 먹으면 사탄의 노예가 된다, 몸이 더 안 좋아진다.’ 같은 이상한 미신이 돌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러한 콘텐츠를 제작해주고, 이를 통해서 이들이 올바른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HIV에 감염된 아이인데, 같은 시간에 같은 알약을 하나씩 복용하면서 점점 건강해져요. 약을 먹으면 슈퍼파워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애니메이션 안에 ‘너희도 건강해지고 이 슈퍼파워를 얻고 싶다면, 정해진 시간에 알약을 꼭 먹어야 해!’ 라는 메시지가 깔린 거죠.
Q. 와, 잠비아 사람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콘텐츠네요. 귀여운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사람들의 인식 개선에 도움을 주셨네요. 의미 있고 멋진 작업으로 다가와요. 혹시, 그 후에는 어떻게 됐나요? 영상을 보고 난 다음 사람들에게 변화가 있었나요?
우선,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잠비아 공영방송국(ZNBC)에서 8차례정도 방영이되었고, 이후 스웨덴 아트펀드(Swedish Institute)에서 펀딩을 받아 에피소드 2편까지 제작이 되었어요. 다만, 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이 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보니, 스토리보드를 짜는 과정부터 에니메이팅에 보이스오버까지 너무나 많은 작업을 제가 혼자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이 프로젝트도 중단되었어요. 영화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항상 지속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작업은 돈을 쓰면서 해야 하는 사업이다 보니, 어딘가에서 펀드를 끌어와서 진행하고 또 다음 펀드 그리고 그다음 펀드를 구해야지만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인데 작가들로 구성된 소규모 그룹 안에서는 이런 펀드레이징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게 항상 어렵다고 생각해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일수록 의미가 있으니, 계속 지속 되어야 마땅한데 항상 경제적인 부분이랑 맞물리면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결국 중단하게 되더라고요. 항상 지속 가능성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래도 이 프로젝트가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게, 애니메이션은 현재 제작이 중단되었지만, 그때 만든 조각상은 아직도 잠비아 국립박물관 앞에 서 있거든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정도 지났는데도 잠비아에 잘 서 있는 것을 보면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웃음)
Q. 정말 멋있네요. 사회 가치가 담긴 문화예술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 해주셨는데, 그 부분은 꼭 한번 다시 생각해보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돼요. 의미 있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전달하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진행되지 못하다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20대의 삶에 대해서 쭉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요. 그렇게 잠비아 생활을 하신 후, 서른 살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어요. 어떤 연유에서 다시 한국으로 오시는 것을 선택하셨나요?
당시 잠비아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는 저도 일자리가 필요했어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지 저도 그곳에 계속 남을 수 있는데, 일단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도 한국 사람이니까, 당연히 제 모국 한국이 가장 편안한 장소이기도 했고 서른 살이 되니 ‘아, 이제 나도 자리 잡아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온 것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하는 게 2012년 10월에 한국으로 딱 돌아와서 이제 정착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남아있거든요. 그때 제 마음에는 뭔가 허전한 공허함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제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 경험해봤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뭔가 굉장히 긴 시간 동안 바라보며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꿈들을 다 이루고, 경험하고 돌아왔으니 이제 한국에는, 제가 훌륭한 일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고,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었죠.
Q. 와, 그런데 저도 정말 공감되는 게 저도 제 나이 29살에 30살이 되면 뭔가 삶이 크게 변하는건 줄 알았거든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오고, 뭔가 새로운 삶을 살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맞아요.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그냥 30살이 되는 게 아니라, 그때가 되면 뭔가 저는 어른이 되는 것 같고, 잘 모르겠지만 저를 위한 계획이 이미 다 짜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딱 돌아왔는데, 길을 잃은 거죠. 그때 했던 생각이 ‘내가 그 먼 아프리카 땅까지 가서,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왔는데 사회는 나를 위해서 뭘 준비해준 거지?’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철없던 시절의 생각인데, 막상 한국에 딱 돌아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현실에는 아무것도 없고, 저한테 남은 거라고는 ‘30대 백수’라는 타이틀만 남아있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그거 다 결국에는 네가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잖아’라고 이야기했었는데, 뭐…… 사실 그게 맞아요. 그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활동들은 저에게 의미가 어마어마 했던 거지 그 의미를 남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거고요. 결국 정리해보면, ‘좋은 활동 그리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왔다.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이렇게 딱 한 줄로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이다음은 뭐지?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에 대해서 질문을 하나씩 던지다 보니, 저 자신이 하나씩 붕괴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하고 싶은 게 없었고, 내가 하고 싶던 건 다 이루었는데…… 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어마어마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냥 30대 백수였으니까요. 현실과 상상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는데, 제가 겪고 있는 현실은 완전 바닥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끝없는 방황의 시작이었어요.
당시 저는 제가 멋진 프로젝트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니까 모션 그래픽 회사가 저를 원할 것이라 생각해서 지원해보고, 소셜 임팩트 프로젝트를 했으니까 사회적 기업도 지원해보고 했는데, 속상하게도 저를 원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어요. 아마, 이미 방황을 하고 있어서 조직에 들어가기는 조금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해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이 의미 있는 활동으로 끝나야지…… 그 활동에 개인적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하면 그다음 활동을 바라보기 어려워지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제가 조울 증상을 겪게 됐어요. 조울이라는 감정을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저 자신을 밑바닥까지 떨어뜨려 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바깥에서 노숙도 했었어요.
Q. 헉, 노숙이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남산 중턱 벤치에 쪼그려 앉아서 추위에 떨다가 이틀 만에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고…… 너무나 절실하게 제가 살고 싶은 방향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는데 그때는 앞이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잠비아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되게 컸던 것 같아요. 한국에 정착하기보다는 그곳에서 뭔가를 다 끝내고 오지 못한 뭔가가 있어서 내가 아직 잠비아를 그리워한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6개월 정도 더 갔다 오면 내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릴 거야 라는 생각으로 유네스코에 다시 지원해서 잠비아로 돌아갔어요.
Q. 아… 그렇게 잠비아로 다시 돌아가게 되신 거였군요. 혹시 그러면, 서른 살 당시에는 아주 힘들었지만 이제 시간이 조금 지났잖아요. 만약, 지금의 작가님께서 서른살의 작가님께 한마디 해줄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음… 서른 살의 저에게 하는 말이라… “너 좀 고생 더 해야 된다.”(웃음)
서른 살이 막 되었을 때, 생각해보면 세상을 참 만만하게 봤던 거죠. 마치 제가 대단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오만해요. 지금 와서 보면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낯뜨겁기도 하고요.
Q. 그렇군요. 저는 그래도 서른 살의 작가님께서는 당시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시고, 작가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을 것 같아서 지금 이 이야기도 멋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사실 나에 대해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전하는 삶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잠비아는 작가님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에게 잠비아는 고향 같은 곳이에요. 잠비아에 가기 전후로 제 삶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잠비아에 가기 전에는 세상 물정 모르고 나 잘났다는 생각에 도취했던 것 같은데, 잠비아의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 했던 프로젝트들이 어떻게 보면 저를 품어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 제가 했던 경험들이 저에게 어마어마한 영감들을 줬고, 지금 하는 작업과 제 삶의 모든 기반이나 기술적 부분부터 이야기하는 부분까지 제가 아티스트로서 작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 곳이죠.
Q. 작가님께서는 여러 아티스트 레지던시들을 경험하셨는데요. 그러던 중, 2019년 <EXISTENCE> 작품에서는 VR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셨습니다. 앞서 드로잉을 기반으로 활동하셨던 두들 아티스트에서 새로운 장르로의 확장을 보여주셨는데요. 이러한 확장은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요?
2017년에 모지아트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전까지는 디지털적인 작업을 주로 했었는데요. 줄리아(Julia)라는 모지아트의 수장이자 관장인 친구를 만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어요. 이 친구가 모지아트를 설립할 당시 가지고 있던 비전이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들어와서 잠비아라는 나라가 역사학적으로 워시아웃되었던 역사를 다시 바로 세우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잠비아의 진정한 뿌리와 조상들이 전해주는 의미와 현대 아트가 어떻게 융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었고, 이 친구는 아트센터이자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잠비아의 역사와 예술의 성장을 이끌었던 거죠. 그래서 그 모지아트라는 곳은 잠비아에서 예술의 성지와도 같았어요.
당시에 했던 전시나 행사가 현대의 젊은 아티스트와 나이 든 아티스트는 어떻게 융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나, 잠비아에 있는 소수의 여성 아티스트들을 모아 전시를 한다든지,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국가의 아티스트들을 초대해서 다 같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경험을 나누는 프로젝트도 있었고요. 저도 이런 프로그램이 너무 좋아서, 영상 촬영을 하면서 도와주고 한쪽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어요. 그러던 중, 이 친구가 제 그림을 보고 “요요진, 우리 이번에 행사하는데 라이브 페인팅으로 큰 곳에 큰 그림을 그려봐!”라고 먼저 제안을 해줬어요.
그 그림을 보고, 옆에 있던 친구가 자기 스튜디오에 있는 문짝에다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서 그림을 그렸더니 그 작품은 아예 쇼케이스를 하자고 해서 남아공으로 보내지고 공모전에 내보내 져서 남아공에서 전시되기도 했었어요. 그렇게 해서 라이브 페인팅과 벽화 그리는 활동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서 그 그림을 보고 벽화 의뢰가 계속 들어왔었어요. 또, 벽화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전시 기회도 주어지고 그러면서 점점 작가 활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러던 중, 2018년 중순쯤 아예 레지던시로 입주를 해서 6개월 동안 작업을 준비하고 2019년 3월에 개인전을 열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모지 아트에서는 컨셉 적이나 기술적으로 되게 다양한 시도를 했었는데 저도 이제 작가니까 조금 더 흥미 있는 방향으로 새로운 표현을 시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회화 작업에 조금 더 흥미를 줄 수 있는 추가 콘텐츠 요소들이 더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VR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명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회화 작가였고 앞으로도 그럴거예요. 다만, 제가 그리는 작품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경험을 제공해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VR이나 AR을 활용한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드로잉이라는 행위 자체에 좀 많은 무게를 두는 편이거든요.
Q. 아, 그렇군요. 기술을 활용해서 관람객들이 회화를 조금 더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였네요. 저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었던 게, 작가님께서는 최근 화두로 떠오른 NFT 아트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세요. 지난 4월 국내 최초 NFT 전시 <‘사운드, 드로잉’> 도 가장 먼저 선보이셨어요. NFT 라는 컨셉에 대해서 어떻게 처음 알게 되셨나요?
아, 네 맞아요. 음 그런데 제 생각에는 NFT 라는 게 되게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잖아요. NFT라는게 새로운 개념으로 세상에 등장하다 보니, 그것을 위한 마켓플레이스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NFT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NFT 라는 개념은 크립토키티라는 게임을 통해서 알게 된 것 같아요. 그 JPEG 파일이 500만원씩 갈 수 있다는 게 저도 처음에는 신기하게 다가왔던 포인트들이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저도 블록체인 쪽에 관심이 있어서 이 컨셉을 어떻게 적용해보면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NFT플랫폼을 이용해서 전시장에 QR 코드의 형태로 연결해두면 NFT 연계 전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Q. 항상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도전하시는 것 같아요. 정말 보기 좋습니다. 작가님께 예술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내 삶에 있어서 예술은 OOO 이다." 형태의 한 문장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리고 왜 이렇게 생각하셨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에게 예술은 ‘자기표현’ 입니다.
예술에 대해 생각해보면, 거대한 담론을 다룰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제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예술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 경험이 대단해! 그러니까 이 작업을 봐!’라는 형태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들은 이런 것들인데, 그 경험을 기반으로 나는 이런 생각을 했고 그것을 표현해냈는데 이런 이미지와 작업이 나왔어.’라는 표현이 저에게는 예술로 다가왔습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제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너는 이 작업을 보고 어떻게 생가하니?’라는 느낌일 텐데요. 그 안에서는 뭐 대단한 담론이 들어갈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냥 농담 따먹기 형식의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자기표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현재 삼청동에서 ‘포장 농방’ 이라는 전시도 하고 계시는데요. 포장 농방 전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같이 나눠주세요.
네, 너무 좋죠. 포장 농방(민성홍, 요요진, 뤀 롸이드아웃)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도시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담긴 전시입니다. 도시에 비어 있는 공공 공간들을 의미 있는 농업적 콘텐츠로 채워 넣는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식량 수급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과 함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 생활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농업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을 조금 달리했으면 하는 마음에 기획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것들은 다 가치 중심적인데, 그 가치를 어떻게 창조해내고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가치를 가치로 인정하고 경제적 시스템을 만들어 낼지가 필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각기 다른 3명의 작가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으니, 8월 29일까지 진행되는 전시에 오셔서 어떤 이미지와 작업으로 전시 공간이 채워져 있는지 한번 오셔서 확인해보시면 좋겠습니다.
Q. 멋진 소개네요. 올해 독자들이 요요진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자리가 있을까요? 2021년 작가님의 계획이 궁금해요.
우선 10월에 신사동에서 하는 6인전이 있고, 또 같은 달에 키아프(KIAF) 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월에는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가을 그리고 겨울에도 꾸준히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에요.
Q.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작가님은 어떤 행보를 걷고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작가/ 아티스트로 불리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늘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날이 온다면, 아티스트 ‘요요진’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요?
10년 뒤라… 살짝 아득하게 느껴지는데요. 멋있는 작가가 돼 있으면 좋겠어요. 요즘 작가로서 먹고사는 것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작업 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고민을 같이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기회를 만들어내고 그 기회 안에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갈지도 고민이 되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제 작업으로 저 자신을 포함해 주위 사람들 모두가 다 잘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제 요즘인 것 같은데, 열심히 하면서도 때로는 더딜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요요진, 그래도 잘하고 있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작가 요요진에게 있어 예술은
‘자기표현’ 입니다."
요요진 (YOYOJIN), 1984-
서울에서 활동
요요진(b.1984)은 유네스코를 통해 아프리카 잠비아에 파견 된 것을 계기로 9년간 현지에서 생활하며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작업의 발판을 다졌다. 그는 당시, 잠비아의 아티스트 그룹 ‘ART4ART’의 소속 작가로 활동하며 HIV/AIDS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전달과 사회적 인식개선을 위한 작품들을 제작하였으며, 2018년 Modzi Arts의 레지던시 프로그램(6개월)에 참여한 이후 YOME(Modzi Arts, 2019), 9to0(Art arch, 2020), Visit for love(The wall, 2020) 등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Better together 2019 글로벌 세미나 수상(월드컬쳐 오픈, 2019), Zer01ne 크리에이터(현대자동차, 2020년), WTA(서울 도시건축전시관, 2021), 서울문화재단(2021) 등에 선정되어 다양한 작업을 활발하게 이어오고 있다.
전시연혁
2021 예술과 화폐의 혼인동맹 NFT전 (갤러리마크)
2021 포장농방 ver2 전시 서울문화재단 지원 (스페이스영)
2021 Sound, Drawing 개인전 (공장갤러리)
2020 Zer01ne: P.Layer 오픈스튜디오 전시(제로원 현대자동차)
2020 9 to 0 개인전 (대한민국, Art Arch)
2019 Renamed: 개인전 (대한민국, I art Seoul)
2019 YOME: 개인전 (잠비아, Modzi Arts)
2017 Perfect Imperfection: 그룹전 (잠비아, 잠비아 국립 박물관)
2011 antiretroviral man: 그룹전 (잠비아, art4art)
프로젝트/콜라보레이션
COACH 콜라보레이션 예정
카카오 그라운드X NFT 참여 예정
서울시 거리예술축제 콜라보레이션 예정
KDB나눔재단 콜라보레이션
지오지아 SS 콜라보레이션
서울문화재단 라이브드로잉 콜라보레이션
레지던시
2021년 울산 과학기술원 과일집 레지던시(1개월)
2020년 Zer01ne 크리에이터(10개월)
2019년 잠비아 로컬마켓 예술 프로젝트 (잠비아, studio 225)
2018년 9월 ~ 2019년 3월 (6개월) (잠비아, modzi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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