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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흙안개가 맞이하는 11월 뉴델리

성큼 다가온 기후위기를 체감한 인도에서의 첫날밤

by 화자

11월 말 어느 저녁, 인디라간디 국제공항(Delhi Indira Gandhi International Airport). 밤 11시 30분.


10시간의 오랜 비행 탓인지 한층 뻑뻑해진 눈가를 비비며 입국장을 나왔는데 시야가 도통 개운해지지 않았다. 한 밤인 것을 잊은 듯한 공항의 인파들을 보니 과연 인구 1위의 대국다웠다. 여기가 14억 명의 인간이 생활하는 땅이란 말인가. 공항에서부터 인도 풍의 무언가를 찾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꽤나 익숙한 현대적인 시설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튼 먼 남아시아 땅을 밟았다는 감상에 좀 젖어 보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다소 거칠게 붙잡았다.


"Seoul? Hyejin?"

진득한 힝글리시 발음으로 내게 말을 건 사람은 굵은 쌍꺼풀이 인상적인 아리안계 인도인이었다. 아, 용케 한국인은 맞췄으나 당신이 찾는 혜진이는 아니라구요. 이젠 해외에서 한국인더러 중국인이거나 일본인이라고 묻는 일은 잘 없다더니 한국인을 알아봐 준 건 고마웠다. 서울에서 온 혜진 씨는 얼른 만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눈인사해주며 같이 나온 출장단을 놓칠세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전히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형형색색의 팻말과 현수막으로 가득한 입국장을 지나 터미널 바깥으로 겨우 비집고 빠져나왔다.


실크로드를 넘어온 5,000km의 하늘길


5,000km 떨어진 머나먼 인도땅에서 유일하게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곱게 다려진 진초록색 터번을 쓴 렌터카 기사님이었다.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터번을 쓰는 시크교도들은 인도의 경제를 이끄는 주요 상업에 많이 분포해 있다지. 짙은 눈썹 아래 진하게 자리 잡은 쌍꺼풀은 많은 인도인들의 특성인가 보다. 그의 무해하게 깊고 큰 눈망울도 인상적이었다. 옛날 시골 할머니댁에 가면 볏짚으로 장난치며 놀던 소의 큰 눈망울을 닮아있었다.


2주일 치 살림이 담긴 배낭과 캐리어를 트렁크에 욱여넣고 나니 가벼워진 어깨만큼이나 마음도 조금 편안해졌다. 검정색 밴에 지친 몸을 실은 채 호텔로 향하는 밤길을 달리며 졸린 눈을 부여잡고 차창 밖을 응시했다.


한밤중의 밤하늘이라기엔 어딘가 모르게 새까만 검정보다는 밝은 진회색에 가까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행기에서의 통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 밤하늘이 왜 밝은 진회색을 띠고 있는지 그 까닭에 대해 시냅스가 관련 정보를 전달하기 이전에 매캐한 흙먼지가 내 콧구멍을 찔렀다.


뇌신경보다 한 발 더 빨랐던 운동신경이 톡쏘는 흙먼지와 함께 출국 직전 여러 차례 보았던 '뉴델리 대기오염'에 관한 기사들을 내 콧구멍으로 가져왔다. 아, 이게 그 대기오염이구나. 미간을 살짝 찌푸리긴 했으나 사실 기분이 나빴다기보다 이렇게 대기상황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유례없는 대기오염을 경고하는 숱한 기사들보다도 지금 내 두 콧구녕을 쑤시는 이 톡 쏘는 건조함이 아직 잠이 덜 깬 나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일깨워줬다.





매년 11월의 뉴델리는 세계에서 가장 숨쉬기 어려운 도시가 되곤 한다.

대기질을 측정하는 여러 대표 지수들이 WHO 권고수치보다 모두 100배 이상 훌쩍 넘기며 100m 앞 사물도 잘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농작물 수확 시즌이 되어 곡창지대라 불리는 하리아나주 및 펀자브주 등 인근 농촌에서 추수 후 볏짚 등 잔여물을 태우는 행위가 오염 유발 1위 요인으로 현지 언론은 분석한다. 그 밖에도 폐자재 무단 소각에 따른 독성물질 확산, 저감장치 없는 발전소·공장 가동, 노후차량 매연 등도 오염 유발 요인으로 꼽힌다.


보통 11월부터 3월까지가 인도의 건기인데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며 올해는 10월에도 비가 오지 않아 대기가 더 정체되고 빗물에 의한 정화작용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11월에는 힌두교 최대의 축제인 디왈리 축제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문화가 있단다. 14억 인구의 약 80%가 힌두교도임을 감안하면 이 폭죽의 연기들도 아주 큰 몫을 하리라. 올해는 평년보다 더 극심한 대기오염으로 학생들의 등교제한 및 차량이동 등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11월 뉴델리의 공기를 마시곤 신기하기도, 혼미하기도 한 이 상황을 기억하고자 호텔로 향하는 차안에서 찍었다.


누구나 한 번쯤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릴 때 갑자기 거대한 10톤 트럭이 지나가며 먼지를 일으키는 바람에 쿨럭쿨럭 기침을 한 적 있었을 것이다. 11월 뉴델리의 공기를 비유하자면 내 코 앞에 그 10톤 트럭이 흙바닥에서 바퀴를 공회전하며 계속 먼지를 일으키는 기분이었다.


뉴스와 활자로는 도무지 피부에 와닿지 않던, 이 초록별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후위기를 깊숙이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봄철 미세먼지만으로도 인상을 찌푸리곤 했는데 대자연의 변화 앞에 겸손해지게 되었다.


지난 7월에 사전 출장으로 방문했을 때는 50도의 살인적인 폭염이 나를 아찔하게 하더니, 이번엔 대기오염이라니. 출장 업무도 모자라 예정에 없던 기후위기를 취재하게 된 내 신세를 한탄하며 미리 앞주머니에 챙겨둔 마스크를 꺼내려는데 차창 밖 둘러보니 현지인은 그 누구도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중에는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부여잡은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소녀도 있었다.


저들은 나처럼 콧구멍이 따갑지 않단 말인가.
오래 진행된 기후위기에 인도인들의 신체는 이미 적응하고 진화한 것인가.


여전히 매캐하고 따갑지만 살기 위해서는 숨을 쉴 수밖에 없기에 두 콧구멍을 통과하는 흙먼지를 무력하게 마셔내며 뉴델리에서의 첫날밤이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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