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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리으리한 궁전, 그리고 맨발의 하인

인도 대법관 저택에 방문하며 만난 맨 발의 하인에 대하여.

by 화자

인도 대법관의 저택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그리 세상을 오래 살진 않았는데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해야 할지, 대법관의 저택에 초대를 받다니요. 내가 소속된 기관이 주최하는 학술대회 저녁만찬을 앞두고 대법관께서 먼 한국에서 온 우리 대표단을 자택에서 가볍게 모시고 싶다는 얘기였다.


출장단이 탄 검정색 밴은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약 15분을 달렸을까. 차창을 통해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려는데 두 눈이 심히 뻑뻑하다. 대기를 뒤덮은 먼지 때문인지, 빽빽한 출장 일정을 소화한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다 되어가서인지 모르겠으나 혼탁한 대기상태만큼 어느덧 내 정신상태도 흐릿해져 있었다. 차창 밖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그 표면에는 눅진한 습기가 비쳐 보이는 듯했다.

들숨과 날숨에 쉼 없이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을 백색소음 삼아 초록색 툭툭이 떼를 300대쯤 지났을 무렵,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철문 앞에 밴이 멈춰 섰다. 저택에 도착했나 보다. 이렇게 시끄러운 도로 한복판에 대법관의 저택이 위치할 줄은 몰랐었다. 하긴 우리도 매일 교통체증에 먼지로 가득한 서울 한복판을 굳이 동경하잖아.


저택의 경비원이 간단한 수색을 하고는 거대한 철문을 밀어재꼈다. 묵직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좌우로 길을 터주어 입장하자마자 바깥의 소음은 쥐 죽은 듯이 사라졌다. 어느덧 뉴델리 도로의 경적소리와 소음에 익숙해졌던 걸까, 되려 지나친 고요함이 대법관과의 미팅을 앞둔 나와 출장단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자로 잰 듯 날카롭게 정돈된 마당의 푸른 잔디 그리고 작은 연못이 눈에 띄었다. 마당을 지나자 대법관이 인자한 미소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맞이했다. 인자한 한 명의 인도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권위가 주는 긴장감을 완화하기에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몇 해 전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를 머릿속에 잠시 소환하는 일이었다. 고위직 인사들은 대개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주름살이 진 얼굴을 하고 있기에 우리 할아버지를 상상하기에 적당한 연배였다. 제 아무리 높은 위치의 사람이어도 늙지 않는 사람 없고, 죽지 않는 사람 없지 않나. 번지르르 근사한 멋진 옷을 걸치고 있는 자들도 언젠가 그 허물을 벗어두고 먼 여행을 떠날 것이라 는 진리를 곱씹다 보면 마음속에서 퍼덕이던 긴장감이 사그라들곤 한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칠이 많이 벗겨진 진초록색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끼익 - 철문이 열리며 내는 소리는 집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누군가 방문했음을 알리는 초인종의 역할을 한다. 먼지가 가득 쌓이다 못해 먼지와 혼연일체가 된 자전거가 놓인 작은 복도를 지난다. 정정하실 때 농삿일로 비가오나 눈이오나 논밭을 다니실때 쓰시던 자전거였다. 정돈되지 않아 잔디가 무성히 자란 작은 마당이 나를 반긴다. 누가 왔나 싶어서 빼꼼 고개를 내민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고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며 함빡 크게 미소를 지으신다. 나도 웃는다. 활짝.


긴장감 완화 목적으로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하려다 그만 눈물이 고였다. 대법관에게 깊숙이 인사드리며 붉어진 눈시울을 황급히 정돈했다. 대법관은 우리 일행을 응접실로 친히 이끌었는데 그곳엔 저녁식사를 방불케 하는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 만찬 전에 가볍게 티타임을 하는 것이라고 분명 사전에 얘기했으나 역시 인도인들의 큰 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점심 식사도 완전히 소화되지 않았지만 대법관 부인이 손수 만들었다는 디저트라기에 다 먹어야만 했다. 티끌 하나 없이 하이얀 식탁보가 놓인 식탁 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음식들이 나를 향해 하이얀 김을 내뿜고 있었다.


식탁에 착석하여 환담을 나누며 한 술 떠보려는데 저만치 응접실 구석에 서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살짝 늘어진 면 티셔츠에 남루한 아디다스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맨 발이었는데 발가락에 살도 별로 없고 피부도 거칠어 보였다.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 식탁 쪽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쳐도 마주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 공허한 눈빛이었다. 그러다 대법관 부인께서 오른손을 들자 명령이 입력된 로봇처럼 그는 신속히 그녀의 옆으로 자리하더니 그녀의 귓가로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 입술이 움직이자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사라졌다.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는 양손에 주전자를 들고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아까 그 공허했던 눈빛은 나를 응시한 채 여전히 공허하지만 목적이 있는 얼굴을 한채 내게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Would you like some coffee or tea, ma'am?"



대법관 저택에서 근무하는 하인인가 본데 이왕이면 저택에서 근무하는데 좀 깔끔하게 입혀주지, 하는 아쉬운 생각이 스쳤다.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맞닿아 있는 그의 맨발을 응시하고 있자니 좀 기분이 그랬다. 마침 배부르기도 하니 그냥 이미 식탁에 놓여있던 물이면 충분하다고, 커피나 티는 먹지 않겠다고 그에게 전했다. 일순간 그의 동공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렸다. 흔들리는 동공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테이블 끝에 있는 대법관 부인과 나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놀란 마음과 함께 무수한 생각들이 스치고 다시 그의 맨발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티 한 잔을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그제야 마음의 평온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다시 응접실 밖으로 사라졌다. 카스트제가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사실상 500여 년 간 이 대륙에서 지속되어 왔던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카스트제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위치하여 잡역, 하인 등의 노예생활을 하는 수드라(Shudra)계급인 것일까.


그는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를 내 앞에 들고 오더니 잔에 따라주었다. 그에게 일부러 눈을 마주치며 짧게 감사하다고 전했는데, 그에게는 그 인사가 굉장히 어색한 것인 듯 시선을 떨구고는 급히 응접실 모퉁이로 향했다. 여전히 맨 발을 한 채.


그 이후로 대법관 그리고 대법관 부인과 함께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제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대신 응접실 모퉁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오므리고 있던 맨 발이 기억 속에 오래 자리 잡았다.


제 기억속 대법관 저택과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장소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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