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풍경은 만국 공통인가 봐.
뉴델리에도 지하철이 있대.
이번 미션은 곧 개최될 학술회의가 개최되기 전 VIP를 위한 커피를 사러 다녀오는 일이었다. 대략 6잔이면 되었다. 회의자료를 검토한다거나 다른 급한 일들을 먼저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 한국에서도 그럴 때 있잖아, 아니 많잖아. 커피를 핑계로 잠시 바깥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내 안에 침전되어 있던 생각 뭉치들을 털어내고 싶다거나, 그냥 머리를 새하얗게 비우고 싶다거나.
마침 회의장 근처에 카페도 마땅치 않아서 무려 지하철로 두 정거장에 위치한 스타벅스에 들러야만 했다. 몸은 좀 귀찮지만 아주 잘 됐다. 모든 게 낯설기만 한 이 외딴곳에서 익숙한 초록색 간판 아래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이라면 출장 내내 가득 마신 먼지들로 텁텁한 가슴 언저리가 한결 개운해질 것만 같았다.
텁텁한 공기가 무색하게 하늘은 청명해 보이는구나.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울창한 가로수길을 따라 5분을 걸어야 했다. 그 나무길은 회의장 대문 앞부터 앞으로 팔을 뻗었을 때 닿을 위치에 있는 지하철역 2번 출구 플랫폼까지 직선으로 주욱 이어져있었다. 이 나무들은 여기서 몇 해를 살아왔을까. 이 땅에도 가뭄이, 홍수가, 전쟁이, 작은 소동이, 혹은 더 큰 폭동들이 있었을 텐데 이 땅에 나무로 태어나 겪을 수 있을 시련들 속에서 이다지도 거룩한 자태로 우거진 가지들을 거느리고 있구나. 비가 안 온 지 꽤 되었는지 다소 건조하고 팍팍해 보이는 거친 땅 표면에 비친 굵직한 뿌리들의 실루엣이 더욱 웅장해 보였다.
마른 흙과 울퉁불퉁한 돌자갈이 박힌 길을 걸으며 자갈이 발바닥에 닿는 느낌을 느껴보려 했다. 해외 출장을 오면 하곤 하는 여러 가지 버릇 중 하나였다.
마른 흙과 울퉁불퉁한 돌자갈이 박힌 길을 걸으며 자갈이 발바닥에 닿는 느낌을 느껴보려 집중했다. 해외 출장 혹은 해외여행을 가면 꼭 하게 되는 작은 버릇 중 하나였다. 앞으로 열심히 걸음을 내딛는 내 두 발을 바라보고 발바닥의 감각에 집중한다. 아 물론, 아래를 보며 걷게 되다 보니 맞은편에 걸어오는 사람들과 부딪힐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괜히 급한 것도 없지만 그냥 잔걸음으로 뛰어보기도 했다. 내 뜀박질이 만든 흙먼지가 안 그래도 안 좋은 공기로 텁텁했던 기관지를 한층 더 간지럽혔다. 지나가는 행인 혹은 홈리스가 쳐다본다.
이름 모를 이 외딴 거리에 내 두 발이 맞닿아 있는 이 순간에 경외심이 들곤 한다. 이족 보행,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굉장히 일상적인 행위이지만, 새로운 국가의 생경한 환경에 발을 닿을 때면 이 일상적인 행위마저 새롭게 음미하게 된다. 일종의 게슈탈트 붕괴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그 시간, 그리고 그 장소에 머나먼 인도 땅에 내 발이 맞닿아 있고 내가 현존하고 있음을 보다 깊숙하게 느낀다. 살아 있음이 더 깊숙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무래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희귀한 순간이라 이러한 감각이 작동하나 보다. 한국에서도 이런 느낌을 가진 채 살아갈 순 없을까. 당장 내일 죽을 예정이고 마지막 하루가 남은 순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A: 뉴델리에도 지하철이 있다니. 신기하지 않아?
B: 그러게, 신기하긴 해. 근데 우리가 생각하는 지하철이 맞을까?
A: 그렇지 않을까? 설마 사람들이 많아서 외벽에 매달려서 가야 하진 않겠지?
B:... 그렇다면 잊지 못할 커피 배달이 되겠군.
함께 나선 동료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생각보다 비슷한 회색 철제 구조물로 된 지하철 입구 풍경에 조금 놀랐다. 물론 알록달록한 지하철역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의 지하철역과 아주 흡사한 현대식 풍경이라 다소 놀랐다. 알고 보니 일본정부의 개발원조사업(ODA)으로 일본국제협력단(JICA)에서 자금 지원 및 기술자문을 통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델리 메트로의 첫 번째 노선이 2002년 개통했다는데, 일본 참 발 빠르게 움직였구나.
우리가 도착했던 대법원역(Supreme Court Station)은 우리나라 서울 지하철 1호선의 신길역과 좀 닮아있었다. 역 입구의 매캐한 쇠내음이 코로 들어오자 자주 다녔던 신길역의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지하철이 아닌 방공호에 다다를 듯 도무지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모를 만큼 끝없는 에스컬레이터가 아득하게 느껴지는 곳. 온통 칙칙한 회색 바탕의 색감과 투박한 회색 철제 덩어리가 가득한 1호선. 그 1호선의 신길역은 바로 옆 한강 물줄기를 두고 여의도역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 대비효과로 좀 낡아 보이곤 한다. 역 내부 전체를 둘러싼 익숙한 쇠내음과 먼지내음에 여기가 대체 신길역인지 뉴델리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알록달록한 지하철 노선도, 힌디어를 잔뜩 두르고 있으나 익숙한 네모난 매표기계,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들, 그리고 일상처럼 역 내부를 활보하는 사람들. 사실 인도인들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는 말이지만 아무리 수도라지만 뉴델리에 이렇게 번듯한 지하철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꽤 우리의 것과 비슷한 모습일 줄이야. 미디어에 인도의 지하철은 많이 노출되지 않은 탓일까, 이곳이 신길역인지 뉴델리인지 모를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우리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지하철 내 보안검색대였다. 지하철 매표소에서 발권 후 개찰구를 지나기 전에 웬 공항에서 보이던 보안검색대가 있지 않은가. 남녀로 나뉜 기다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컨베이어벨트에 물건을 두고 얼룩진 천을 걷어내어 간이 부스에 입장하니 그 속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여자 보안관이 나를 근엄하게 째려본다. 마치 그 눈빛에 겁을 먹어야 할 것처럼. 그녀는 이 작은 공간에 앉아서 몇 시간을 똑같은 행위를 반복해 왔던 걸까. 누군가 들어오고, 째려보고, 기계로 몸을 훑고, 다시 누군가 들어오고. 귀찮은 듯 이리저리 내 몸을 훑던 기계는 역시 아무 소음도 내지 않아 무리 없이 그 부스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항도 아닌데 웬 보안검색대인가 싶었는데 홈리스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흙먼지가 온통 에워싸고 살인적인 더위에 노출되는 야외의 노지에 주저앉아 구걸하는 사람들에겐 깊숙한 지하의 이곳이 충분히 아늑한 쉼터 혹은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
일순간 내가 서울에 돌아온 건가 싶었다.
가까운 스타벅스가 있는 코넛플레이스역(Connaught Place Station)까지 3 정거장 남짓.
기다리던 지하철이 사람들을 가득 싣고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리본을 풀어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오픈하는 마음으로 내부로 진입했다. 사람들로 이미 내부가 꽉 차있어서 혹시라도 소지품을 잃을세라 가슴에 꼭 안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기로 했다.
잘 다려 입은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따위의 서구식 복장을 입은 남녀,
손에는 딱딱한 가죽 서류가방,
45' 아래로 시선을 떨구어 핸드폰에 고정된 시선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들,
무표정한 얼굴들.
거리에서 흔히 보이던 전통의상을 입은 아낙네나 노인들이 이곳에선 보이지 않았다. 피부색 다른 외국인의 출현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하철이 운행하며 내는 소음 외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일순간 내가 서울에 돌아온 건가 싶었다. 이 열차를 그대로 서울 지하철 1호선에 옮겨 놓아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인도스러운 무엇'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지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자이카(일본 국제협력단)가 지하철 시스템을 지원하면서 지하철을 사용하는 문화도 그대로 이식한 걸까. 내심 아쉬웠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하기도 한 이 풍경을 조금이라도 내 눈에 오래 담고 싶어서 사람들 사이에 낀 채로 눈알만 이리저리 열심히 굴렸다. 이따금씩 폰을 보던 현지인과 눈이 마주치곤 했는데 길 잃은 눈동자가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떨구고 마는 어색한 2-3초의 순간마저도 익숙했다.
여기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엄마 포대기에 싸인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꼬마 아기 같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싱긋 웃어 보이자 눈이 동그라진 아기는 내 쪽으로 팔을 뻗어 허우적 대었다. 그와 시선을 맞추다 하마터면 내려야 할 역에 내리지 못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