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의 직물 시장, 잔파스 마켓을 거닐며
학술행사 중간에 잠시 홀 바깥으로 나와 빈 벤치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고 쉬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 눈을 떠보니 청록색의 고운 인도 전통복장, 사리(Saree)를 입은 인도 여직원이 나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지루한 학술대회장을 잠시 빠져나온 듯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선명한 청록색의 복장이 눈에 띄었다. 짙은 청록색의 실크가 그녀의 몸을 타고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지나치게 몸에 달라붙진 않아 여유 있는 품이 더욱 우아해 보였다. 그녀가 입고 있던 사리는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이 걸치고 있는 하늘하늘하며 우아한 옷매무새를 닮아있었다. 어느새 어렸을 적 열심히 보았던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 속 여신들의 복장 중 그녀의 것과 비슷한 건 없었는지 상상해보고 있었다. 실제로 실크로드를 타고 그리스-로마와의 교류가 활발하여 힌두교 신상의 얼굴도 서구인과 닮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청록색의 빛나는 천은 온몸을 휘감고도 모자라 그녀의 왼팔에 두둑이 얹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의 전통문양들이 빼곡하게, 그러나 원래 거기 있어야 했듯이 정교하고도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 각각의 문양들의 의미를 과연 그녀는 알까. 하긴 나도 한복 섶과 옷깃에 수 놓인 꽃과 용문양의 의미를 외국인에게 설명할 수나 있나. 근데 왼팔에 저렇게 천을 든 상태로 화장실은 어떻게 간담. 왠지 실용성으로는 빵점일 것 같아 보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았어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 여직원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굉장히 새것의 컨디션으로 보였는데 무려 어머니가 결혼식 때 입었던 사리를 물려받은 것이라니.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그녀의 어머니가 아른거리며 그 옷에 대한 자부심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보였다. 지금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예물의 일환으로 값비싼 금붙이, 은붙이, 이불, 정장 따위를 마련하여 자식들에게 물려주곤 했다던데. 불현듯 예전에 고향집에서 엄마랑 옷장 정리하다가 엄마가 대학 때 입었던 긴 멜빵 청치마를 발견하고 맘에 쏙 들어선 내가 입겠다고 강제로? 물려받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중 그녀의 눈동자가 참 깊고 예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를 얘기해 주었더니 마침 그녀의 이름이 인도어로 ‘눈’을 뜻한단다. ‘아키(ଆଖି ākhi)’라는 발음이었는데 나중에 검색해 보니 힌디어가 아닌 ‘오리야어(Oriya)’라는 소수언어에 해당하는 단어였다.
청록색의 우아한 사리를 입은 아키는 계속해서 전통 복장에 관심을 보이는 내게 학회장 근처 직물상점이 모여 있는 잔파스 마켓(Janpath Market)을 추천해 주었다. 대충 너무 고급진 것 말고, 인도 거리냄새가 폴폴 나는 직물들이 가득한 곳을 알려달라고 했었다. 그곳은 현지인들로 주로 붐비는 곳이니 너무 늦은 시간 방문하진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녀는 잔파스로 향하는 길을 일러주었다.
공식일정이 종료되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던 즈음, 그녀가 일러준 대로 잔파스로 발걸음을 향했다. 방문기관에서 선물 받은 황토색 숄을 치렁치렁 걸치고 나섰다. 재질을 잘 모르는 내가 만져봐도 꽤 좋은 품질인 듯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숄이었다. 길이가 내 키만큼 길었는데 혹시 양탄자를 준 건가 생각이 들었다. 끄트머리에 달린 빨간색 라벨에는 ‘Dharliwal Lohi'라고 적혀있었다. 인도 북서부 펀자브 주의 달리왈 지방에서 사육되는 로히(Lohi) 양에서 얻어지는 보온성이 좋은 섬유였다.
인도 여인들처럼 온몸에 휘감거나 어깨에 두를 수 있어 보였으나 그날도 매캐했던 공기를 막아보려 부르카(Burqu)처럼 머리와 얼굴에 가득 두르고 길을 나섰다. 그런대로 길가의 매연은 막아주는 것 같았다. 거의 눈만 빼꼼 내놓았는데도 여전히 관광객 같아 보였는지 호객꾼들이 달라붙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부인?"
“잔파스 마켓이요.”
“잔파스 마켓보다는 델리 하트(Delhi Haat)가 더 좋습니다. 파시미나 숄과 고급 사리를 사실 수 있어요. 잔파스 마켓은 질 좋은 제품을 팔지 않아요. 구제 제품만 가득한걸요. 제가 델리 하트로 모셔다 드릴게요.”
이 주변 툭툭이 기사들이 델리하트와 커넥션이 있나 보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기사는 쉴 새 없이 내게 델리 하트의 특장점에 대해 늘어놓았다. 자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면만 보고 있는데도 꿋꿋이 얘기를 이어간다. 대단한 집념이다.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매연에 뒤덮여 뭐라고 하는지 사실 잘 들리지도 않았다. 간절히 바라던 초록색 신호가 들어서고 그에게 한 손을 들어 작별인사, 혹은 나는 당신에게 속아주긴 글렀으니 얼른 다른 손님을 알아보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나서야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숄이든 사리이든 인도 거리의 내음이 나는 직물을 사야겠다고 맘먹고 나선 길이라 거리의 가지각색 사리를 걸친 인도 여인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대부분 전통 복장을 걸친 여인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일반적인 서구식 복장을 한 여성들도 꽤 보였다. 그들은 대개 기껏해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들이었다. 인도에서도 세대가 교체하고 있는 것이리라.
신분에 따라서도 사리의 재질, 모양 등이 다르다던데.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제인 카스트제가 공식적으론 법에 의해 없어졌다지만 사람들의 관습은 항상 법보다 질기니까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겠지. 이 주변 행인들의 사리들은 한눈에 봐도 아까 학회 만찬 자리에서 뵈었던 대법관 부인들의 그것과는 굉장히 달라 보였다.
인도 거리의 행인들에게서 10초 안에 '빨주노초파남보'를 모두 찾을 수 있다.
주변의 인파와 상점이 더 많아진 것을 보니 거의 잔파스 마켓에 다다랐나 보다. 인도의 행인들은 다채로운 색깔을 사랑한다. 수많은 민족과 언어만큼이나 옷 색상도 다양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무지개 색깔을 모두 찾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이다. 심지어 채도도 아주 높은 것이 쨍한 컬러들을 사랑하나 보다. 대체로 그리 튀지 않는, 무채색의 색상을 즐겨 입는 한국의 행인들에 익숙하다 보니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아주 쨍한 색감들의 향연이 마냥 즐거웠다.
빨주노초파남보, 빨주노초파남보.
잔파스 마켓 입구에는 작동을 하는지 모를 남루한 보안게이트가 있었다. 동네 시장에 입구에 웬 보안 게이트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족히 20년은 묵어 보이는 낡은 게이트는 내가 지나자 약간의 삑사리와 함께 ‘삐삑-’ 소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나를 반기는 기다란 장대에 높이 걸린 오색의 실크, 면, 린넨 등 직물들. 자욱한 먼지를 입어서 여기 있는 직물들 색상의 공식명칭에는 꼭 ‘dusty~’를 붙여줘야 할 것만 같았다. 아까 그 호객꾼이 여기는 중고품이 많다더니 어설프게 부욱 찢어낸 상자에 휘갈겨 적힌 가격은 300루피, 500루피 등이었다. 주인을 만나길 기다리는 직물들과 옷이 들쭉날쭉 장대에 걸린 채 먼지바람에 휘날려 춤추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얼마나 오래 장사를 하고 있었을지 깊숙이 패인 주름이 인상적인 할머니 상인, 늦은 끼니를 때우려 매대 옆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며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밥을 허겁지겁 먹는 아주머니, 직물을 둘러보는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엄마의 속은 모른 채 옆에서 보채고만 있는 코흘리개 아기, 긴 세월의 때가 겹겹이 묻은 허리춤의 색(Sack)을 풀어 하루치 장사를 결산하는 듯 돈을 세는 아저씨, 커다랗지만 빈 눈동자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상인, 점포에서 뒷짐 지고 나와 높은 콧대를 자랑하며 거리의 상인들을 지켜보는 점포 상인. 저 자는 거리에서의 장사생활을 청산한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하다. 그 눈동자에는 점포상이 된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거리 장사꾼에 대한 측은함이 모두 담겨있었다.
거리 한 켠의 담벼락 옆에서는 조금 더 화려한 전통복장을 입은 남녀들이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대체로 다채로운 색상과 문양의 복장을 많이 입는 인도인들이지만, 무리 한가운데 화려한 머리장식을 한 여성이 입은 사리는 ‘더스티 핑크’가 아닌 갓 직물상점에서 짜온 선명한 ‘핫핑크’ 색이었다. 인도의 결혼식 풍경이었다. 신부 고향집 앞 거리에서도 결혼식 행사를 한다더니 그런 모양이다. 군무라고 할 순 없지만 율동이라기엔 안무가 있는 춤동작을 반복하며 남녀 무리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깔깔 웃으며 춤추고 있었다. 점잖진 않지만 싱그러운 웃음들이 예뻐 보였다.
끝을 모르는 그 결혼식 음악과 웃음소리는 내가 마켓을 빠져나갈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