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윤상의 ‘PART I’ 앨범 커버다. 이 앨범에는 내가 좋아하는 ’넌 쉽게 말했지만‘이 수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해 세상의 빛을 본 노래라 애착이 가나 보다.
살면서 노래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마는 나 역시 노래를 좋아한다. 이때 노래는 내가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아닌, 누군가 가창한 노래를 말한다. 나는 이 노래를 듣는 것을 즐긴다.
중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친구들보다 1년 정도 늦게 갖게 된 아이리버 MP3가 제일 소중한 물건이었던 시절이었다. 어쩐지 나는 뉴에이지와 힙합을 좋아했다. 성격이 판이해 보이는 장르들이지만, 나의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됐다가, 하루는 뭣 같은 세상과 맞서는 20대 청년에게 빙의했다. '음악은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에겐 현실이었다. 자칫하면 삐뚤어지고도 남았을 유년기를 무사히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노래 덕분이었다.
노래를 들으면 세상과 차단되는 느낌이 특히나 좋았다. 아빠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맞고, 화풀이에 가까운 엄마의 비난을 받았던 내게는 오직 MP3 뿐이었다.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눈치를 보느라 잠그지 못한 방문을 조심히 닫고 최대 볼륨으로 노래를 들으며 숨죽여 우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음악의 차음성(제법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의미는 복잡하지 않다)을 공부, 업무 등 집중이 필요할 때도 많이 활용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에어팟을 끼고 있다. 오히려 음악이 작업을 방해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 이어폰을 귀에 꽂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게 어색하다.
심리적인 요인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나의 세계에 다른 세계가 끼어드는 것을 막는 차원에서 음악을 듣는 편에 가깝다. 어떤 이와의 세계와 엉키는 느낌이 들면 극도로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홀로 있는 상황만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듣진 않는다. 장르를 가리진 않지만, 요즘은 90년대 노래를 부쩍 자주 듣고 있다. 특유의 쓸쓸한 정서, 담백한 한글 가사가 좋다. 그때 그 가수들만의 투박한 발성도 사랑한다. 오늘은 윤상의 '넌 쉽게 말했지만'을 들으며 일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