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2023년 마지막날 한 카페에서 찍은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날이면 꼭 아이패드와 로지텍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긴다. ‘PenCake’라는 앱까지 실행하면 두려울 게 없는 글쟁이가 된다.
내가 처음 자진해서 글을 쓴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미운 사람의 이름을 벌건 펜으로 몇 번 끄적인 것은 제외한다). 아카펠라 그룹치곤 라이브가 불안정하지만 아카펠라 그룹치곤 미모가 상당한 동방신기가 ‘혼돈의 끝’을 노래할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인터넷 소설, 판타지 소설, 그리고 팬픽에 푹 빠져 있었다. 틈틈이 읽었고 때때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단 한 번도 소설을 끝내지 못했다. 기승전결 중 ‘ㄱ’ 수준까지만 끄적이다 매번 다른 소재로 넘어갔다. 공책 2장 정도의 분량이 최대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신 그 2장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어휘와 묘사를 총동원해 열심히 썼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서로 글을 메일로 공유하고 피드백까지 주고받았다. 훈련인 줄 몰랐던 그 훈련 덕분에 글과 밀접한 관계인 사람으로 자라난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하지만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그 흔한 백일장 상장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나마 관련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것을 꼽자면, 공부하지 않고도 고등학교 시절 내내 국어 1등급을 놓친 적이 없다는 정도다. 하지만 국어 시험 성적과 작문 능력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뿐더러, 문학과 비문학 중에 어려운 것을 고르라면 난 늘 전자였다. 대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문학을 잘 쓰는 사람으로 통하지 않나. 이에 나는 한때 내가 글쓰기와 먼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내가 나의 글쟁이 여부에 의문을 품게 된 계기는 대학교 3학년 전공 필수인 ‘국어과교육과정론’ 수업이었다. 이 수업은 일부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하고, 일부는 이를 비평하는 글을 써온 뒤, 다 함께 토의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나는 늘 비평하는 쪽이었다. 첫 번째 토의 때 우연히 비평 조에 배정되었는데, 교수님이 나의 시각이 담긴 글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해 주신 덕분이었다. 결정타는 학기 종료 직전의 면담이었다. 교수님은 내게 글을 정말 잘 쓴다며, 졸업 이후 자신에게 더 배워볼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셨다. 대학원으로의 납치 시도였겠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는 글에 대한 칭찬만 가득했던 듯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국어선생님이 될 줄 알았던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단연코 내가 특출 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차고 넘치며, 나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글을 어렵게 써내는 사람이었다. 그마저도 돈벌이를 위한 글이니 재밌지도 않았다. 그렇게 번아웃이 찾아왔다. 신기하게도 그제야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견딜 수 없어질 때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블로그에 토막글을 3~6개월 간격으로 올리곤 했다.
한참이 지나, 그 토막글 중 몇 개를 지인이 보게 됐다. 우리는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중이었다. 그런데 웬걸, 액정을 뚫어져라 보던 지인의 뺨과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 글을 보고 우는 것이었다. 그는 “이 마음을 너무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담담한데 이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고 감상을 털어놓은 뒤, 휴지를 뽑아 눈가를 연거푸 닦았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서 무엇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 가운데 별스럽지 않은 내 글이 어떤 이의 어떤 감정을 발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이 같은 경험은 꽤 신선했지만, 영화나 드라마처럼 이로 인해 내 인생이 바뀌진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큰 사건이었음은 맞다. 장차 직업을 바꾸게 되더라도, 멋들어진 소설이나 시를 쓰지 못하더라도, 나의 글로 명예나 부를 얻지 못하더라도,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 뜨거운 순간을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 ‘나 소싯적 남자 꽤 울려본 여자야’라고 자랑할 수는 없겠지만, ‘나 소싯적 글로 몇 울려본 여자야’라고 조금은 수줍게 허세를 부릴 수는 있겠다. 이만하면 멋진 글쓴이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