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 이상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국에 온 지 두 달이 지났다. 11월 한 달은 자가격리 끝나고 바로 있던 내 생일, 그리고 친구들과의 만남과 연락으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12월이 고비였다. 무료함이 금방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렇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곧 덴마크로 돌아가리라 다짐한 뒤엔 뭘 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돼버렸다.
2.
커피 클래스를 신청했다. 한 달 과정의 취미반과 두 달 과정의 창업반 중에 고민을 하다가 사장님과 협의를 봤다. 경제적인 부담이 커 한 달 과정에서 수업을 조금 더 추가하는 것으로 했다. 매주 목요일 카페에 가서 커피콩의 역사부터 커피 추출법, 머신 이용법 등을 배웠다. 재밌었다. 커피 맛도 모르면서 커피 없이 못 사는 편이었는데, 이젠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 없이 못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일은 마지막 수업일이다. 클래스를 듣기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큰 차이는 없다. 이 5주 차 과정만으로 덴마크에 돌아가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을 뿐. 근데 뭐랄까. 더 소중히 대하게 됐다. 내가 마시는 커피 한잔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손길이 닿았는지 이제 안다. 졸음을 쫓아내는 각성제, 예쁜 공간에 머물기 위한 공간 값, 수다 들러리, 스트레스 해소용으로만 소비하던 커피가 누군가에겐 수단이 아닌 가장 중요한 인생의 무언가라는 걸 안다. 이래서 인간은 평생 배우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나보다. 배우지 않으면 귀한 줄 모른다.
3.
1월이 되었으니 또 새로운 뭔가를 해야 될 것 같다. 빠르면 2월 출국을 생각하고 있어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래서 토플 책을 다시 폈다. 아이러니하게도 토플 시험을 취소하고 나니 토플 공부가 하고 싶어 졌다. 9월에 호기롭게 신청한 1월 9일 시험을 취소하고는 책을 폈다. 강의 기간은 이번 달까지라 유형이라도 익혀두자는 마음에 인강을 틀었다. 엑스자로 가득한 출석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가 월요일부터 생겼다. 마음을 비우니 조급함이 사라지고, 조급한 마음을 잠재우니 효율이 더 오르기 시작했다.
4.
지금껏 인생을 토익 토플, 공부하듯 바라봐온 것 같다. '단기완성.' 몇 달 안에 몇 점 도달하기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지기도 했다. 28살까지는. 몇 년 안에 졸업하고 몇 년 안에 취업하면 되고 몇 살만 넘지 않으면 된다는, 나이라는 마지노선 안에서 큰 틀을 벗어나지 않고 그럭저럭 잘 움직여왔으니까. 그래서 보통 방학 기간인 두 달 안에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점수를 만든다기에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토플 책을 처음 폈을 때 분량에 숨이 턱 막혔다. 나이와 상관없이 눈 앞에 놓인 일에 숨이 턱 막혀 좌절할 수도 있는 건데, 실패할 수도 있는 건데, 그래도 되는 건데, '다들' 안에 내가 속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그동안 무엇이 그렇게 조급했을까. 무엇이 그렇게 날 조급하게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