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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Jun 07. 2022

isfj의 러닝 일지

덴마크도 6 6일은 빨간 날이다. 같이 사는 사람은 쏟아지는 비를 뚫고 연구실로 출근했고,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연휴 마지막 ,  할까 하다가 뛰기로 했다. 뛰고 오니 날씨 핑계를 대며 하루 종일 리모컨만 붙잡고 있던 시간이 용서되는 듯했다. (용서를 받아야  일인가 싶지만)


30대에 접어든 친구들은 하나같이 살려고 운동을 한단다. 필라테스, 헬스 PT, 테니스 등등.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입만 나불거렸다. 이제는 '한국에 있었으면..' 하고 핑계 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필라테스에 등록하지도 PT를 끊지도 않았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 오늘은 왜 갑자기 뛰쳐나갔냐면 더 이상 핑계 댈 게 없었다. 비도 어느새 그쳐 해가 고개를 내밀었고, 무엇보다 6월의 첫 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6월의 첫 월요일'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MBTI를 맹신하진 않지만 떠돌아다니는 isfj 특징 짤을 볼 때마다 확인사살을 당하는 느낌이다. 특히 인싸 중에 아싸, 아싸 중에 인싸라는 말과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는 점에서. 아이보리색 티셔츠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생각 공장은 걱정거리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조명엔 안 비쳐도 자연광에 스포츠 브라랑 속살이 비치면 어떡하지? 뛸 때 뱃살 출렁거리는 게 보이진 않겠지 설마?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생각 공장은 잠을 자지 않는 이상 멈추는 법이 없었다.


'러닝 할 때 듣기 좋은 노래'의 쿵쾅대는 비트로 겨우 걱정을 잠재우고 밖을 나섰다. 런데이 어플을 켜고 트랙에 들어섰다. 러닝 하는 몇몇 사람과 트랙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나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모자도 푹 눌러쓰고 나왔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트랙을 돌 때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고 날 계속 관찰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1도 관심 없을 확률이 200 퍼센트가 넘지만 나는 isfj인 관계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왜 날 쳐다보지',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옷이 비치나', '내가 뛰는 폼이 웃긴가', '뛰다 걸으면 이상하게 보려나', '다들 뛰기만 하는데 걷다 뛰고 반복하면 튀려나', '런데이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건데' 등등. 생각나는 것만 이 정도지 그때의 나는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트랙을 돌다가 사람이 없는 숲길로 방향을 틀었다.



길게 뻗은 산책로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마음 놓고 헉헉 대면서 뛰고 있는데 어디선가 마라톤 고수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민소매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날보고 함박 미소를 지으며 "Jeg glad 블라 블라"라고 하셨다. 뭐가 기쁘다는 거지? 안 그래도 쓸데없는 생각을 잔뜩 안고 달리던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뿐인가. 앞만 보고 뛰다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는데 엄지손톱만 한 똥파리가 허벅지에 붙어있었다. 혼란에 혼란이 더해진 그때 런데이 앱에서 "오늘의 달리기를 종료합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보통은 뛰면 잡생각이 사라져 좋다는데, 나는 왜 뛸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건지 개탄스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웃긴 건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상쾌함과 뿌듯함 외엔 그 어떤 생각과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같이 사는 사람에게 달리기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더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날 위로해줬다. 7년간의 교육으로 만들어진 학습형 위로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위로를 받았다. isfj라서 그런 걸로.. 계속 밀고 나가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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