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지희 Nov 05. 2019

AI로 만난 장국영, "13년 만이네요"

나의 레슬리 ep13 : 장국영과 함께 걸어온 시간들 (2)

<這麼遠,那麼近 (이렇게도 먼, 저렇게도 가까운)>은 2002 년에 발표된 장국영의 노래 제목이다. 홍콩 아티스트인 황요명과의 콜라보로 화제가 되었던 곡인데, 2016 년의 어느 봄날 난데없이 이 노래 제목이 ‘張國榮’을 검색어를 설정해둔 내 RSS 피드에 찾아들었다.


당연히 이 노래를 누군가가 리메이크를 했다는 소식이려니 했는데 그것보다 백만 배는 더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2016년 4월 1일, 중국의 구글이라 불리는 바이두에서 아주 특별한 행사를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隔空對話 - 這麼遠,那麼近>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행사는 장국영의 13 주기를 맞아 바이두가 자체 개발한 AI로 장국영이 하늘에서 보낸 가상의 메시지를 만들어서 팬들에게 공개했다는 것이다.


빅데이터와 딥러닝, 정서음성합성기술 등 최첨단 기술이 집대성된 이 음성은 빅데이터로 수집된 장국영의 영화, 드라마, 인터뷰 등에서의 목소리를 토대로 음성 모델을 구축한 다음, 여기에 감정 요소를 더한 것이라고 한다.


<천녀유혼>의 영채신 피규어. 장국영이라기 보다는.. 어쩐지 우리나라 배우 이필모가 떠오른다.


가상의 음성이라. AI 가 사람과 바둑도 두는 세상이고, 일본에서는 AI 가 쓴 소설도 나왔다지만 (도입부를 몇 줄 읽어보았는데 심지어 서정적이어서 놀랐다) 사실 나는 팬들이 음성을 듣고 울었다는 기사 내용을 읽고서도 그 문제의 음성이 별로 기대가 되지 않았다.

비슷해봐야 얼마나 비슷하겠나 싶은 마음이 절반이요, 아 이제는 장국영이 AI 기술을 홍보하는 데에까지 활용되는구나 싶은 마음이 절반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영상에서 흘러나온 첫마디를 듣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十三年了 (13년 만이네요)”

하는 첫마디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생전의 목소리와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AI라서 어쩔 수 없는 걸까 싶을 정도로 기계음이 너무나도 많이 섞여있는 느낌이다.

특유의 쇳소리 섞인 허스키 보이스를 재현하려다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다. 오히려 실제 목소리를 살짝 음성 변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2-1.3배속으로 빠르게 감으면 저런 소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말투나 뉘앙스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첫 문장에 눈물이 핑 돌았던 것도, 발음을 하는 방식이나 말투가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13년 만이네요”라는 말도 꽤 강력한 한 방이었지만.


한꺼번에 후루룩 들을 수가 없어서 잠시 멈췄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처음부터 들어봤다. (<나의 레슬리>의 모든 중국어는 홍콩의 표기법을 따라 번자체로 작성되었지만, 이 글은 중국에서 공개된 원본을 따르기 위해 간자체로 옮긴다)


https://v.youku.com/v_show/id_XMTUxOTM2Nzg0MA==.html?sharefrom=iphone&sharekey=2433c7cff2a50b81fcefc142ef3f1c7a2



13 年了,久等了,幸苦你们。
13 년만이네요, 오래 기다렸죠. 여러분 모두 고생 많았어요.



很久没见,你们好好吗?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모두 잘 지내나요?



这么多年过去,谢谢你们始终记得我,昨天已经过去很久,我现在很好,哪里 都没去,始终在光阴里,所以你们不要哭,不要再为我哭了。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저를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시간이 참 많이 흘렀네요. 저는 지금 아주 잘 지내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처음부터 이 시간 속에 있었어요. 그러니 여러분 울지 마세요, 다시는 저를 위해 울지 마세요.



我知道,过去这么久,你们都长大了,经历了那么多相逢和别离,停留和出发 ,拥有和失去,一定懂我在说什么,我知道你们懂。
알아요, 세월은 이미 많이 흐르는 동안 여러분들 모두 성장했다는 것을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기도 하고, 또 무언가를 얻었다가 잃기도 했다는 것을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해했다고 믿어요.



时间一定过得比你们想象中还要快吧,世界是不是也和自己想象中不太一样, 长大很乏味,很没意思,也很疼吧,会偶尔失眠,偶尔喝醉,偶尔孤单,偶尔 沉默,越是长大,失去的就越来越多,但也没什么别的办法对不对。
시간은 상상보다 빠르게 지나가죠. 세상도 상상과는 다르고요.

성장을 한다는 것은 매우 무미건조해요. 재미도 없고, 너무 아프죠.

때로는 잠 못 이루는 날도 있고, 때로는 술에 취하거나, 고독을 느끼거나, 침묵하는 날도 있을 거예요.

성장을 할수록 잃어가는 것도 점점 많아질 거예요,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这些我都懂,因为这就是长大的无数个瞬间。昨天还不能面对的别离,今天就 必须要去面对了。昨天还不能原谅的爱人,今天就必须要原谅了。昨天没说出 口的我爱你,今天发现再也没机会了。
나는 모두 이해해요.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모두 성장을 위한 무수한 순간들이기 때문이에요.

어제는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이별을 오늘은 마주해야 해요.

어제는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을 오늘은 용서해야 해요.

어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도, 오늘은 다시는 말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人生已经太匆匆,不要再苦苦的追寻昨夜下过的雨,过去就过去了,接受它, 拿起它,放下它,才能真的放自己一马。希望你们不孤单,勇敢地为自己喜欢 的生活而活,永远站在光明的角落,我只希望你们开心快乐地生活。
삶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갑니다.

더 이상 어제 내린 비를 힘들게 쫓는 대신, 과거는 과거로 흘려버리세요.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들었다가 내려놓으세요. 그것이 진정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방법이에요.
여러분이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용감하게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고 영원히 이 시간의 한 켠에 서 있기를 바라요. 저는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지내길 바랍니다.



2013년 10주기 기념 콘서트를 즈음해 발매된 피규어. 왜 이렇게 세상 느끼하신지 원...



연필로 꾹꾹 눌러쓰듯 다시 한번 천천히 듣고, 모르는 뜻은 찾아서 해석하면서 나는 이 메시지가 정말 장국영이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사람이든 AI 이든 간에 이 내용을 써 내려간 작가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안다. 중간중간 장국영의 노래 제목이나 가사가 섞여있는 것을 보면 다분히 전략적인 스크립트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13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20대에서 40대가 된 내가 장국영의 목소리로 듣는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남다른 울림이 있었다.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들었다가 내려놓으라는 말은 제대로 눈물 한 번 흘려보지 못했지만, 그래서인지 더욱더 오래 걸렸던 장국영과의 이별을 떠오르게 했다.

내가 울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이 음성파일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문득 추억의 가수 냇 킹 콜의 딸인 나탈리 콜이 음성합성 기술을 이용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듀엣곡 <Unforgettable>을 만들어냈을 때 감개무량해했던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가 어릴 때 좋아하던 가수야, 하며 이 노래를 듣고 또 듣던 모습이.

당시엔 세상을 떠난 사람과의 듀엣이라니 세상 참 좋아졌다 했는데 이제는 없던 음성도 만들어내는 세상이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긴 하는가보다. 2019년 4월에 공개된 사진. 지금까지 본 중에 제일 비슷한 축에 든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언젠가는 장국영이 사이버 가수가 되어서 신보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

어쩌면 AI 장국영이 노래한 신곡을 듣고, 언젠가는 AI 장국영의 라이브를 홀로그램으로 안방에서 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다분히 만화적인 상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언젠가는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올해 4월 1일에는 CG로 그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으니,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가능할 일일 수도 있다.


장국영이 사이버 가수가 되어 나타난다면, 그건 장국영일까 장국영이 아닐까.

죽음조차 방해할 수 없는 궁극의 엔터테인먼트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런 것은 내 취향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듯, 떠난 사람은 떠난 대로 고이 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비록 내 곁에 없더라도 진짜로 노래하고 진짜로 춤추는 장국영이 좋단 말이지.





덧붙이는 글.

혹시 브런치북으로 <나의 레슬리>를 읽으셨나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브런치북은 브런치에서 연재 중인 <나의 레슬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아래로 이동하시면 매주 업데이트되는 새 글도 만나실 수 있답니다. :)


https://brunch.co.kr/@myleslie




이전 13화 중화서국, 예스아시아.. 그리고 애플뮤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