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슬리 ep33 : 장국영과 함께 걸어온 시간들 (4)
횟수를 세다가 중간에 놓쳤지만, 나는 꽤 여러 번 홍콩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 덕에 몇 년 전에는 <프라이빗 홍콩>이라는 아는 사람만 아는 매우 ‘프라이빗한’ 홍콩여행 책도 한 권 냈다. 그래서 여기까지 듣고 나면 다들 내가 매해 장국영의 기일마다 홍콩에 다녀올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남들이 상상하듯 매년 살뜰하게 홍콩에 다녀오지는 못했다.
그 날짜에 제대로 맞춰서 갔던 것은 그래 봐야 서너 번쯤이었을까. 출장으로 다녀온 어느 해에는 얄궂게도 4월 1일 바로 전날 서울로 돌아와야 했던 적도 있었다. 비용과 일정이 허락한다면 최대한 찾아가겠다고 마음먹고 실행한 결과치고는 좀 섭섭하다. 어느 해에는 예산이 부족해서, 또 다른 어느 해에는 바쁜 회사의 일정을 핑계 삼아 홍콩에 가는 것을 다음 4월 1일로 미루곤 했던 것 같다.
새삼 난 그렇게 성실한 팬은 아니었구나 싶다.
2018년 4월 1일은 엄청난 갈등 끝에 홍콩행을 결정했던 만우절이었다. 이렇게 망설였던 적이 있나 싶었을 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던. 그 전 해에 이미 두 번이나 홍콩에 다녀오기도 했고, 엄마의 칠순 기념으로 스페인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항공 마일리지도 넉넉했고, 10박을 모으면 1박을 준다는 호텔 예약 서비스에는 무료 1박 쿠폰도 대기 중이었다. 교통비와 밥값만 있으면 될 텐데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다. 4월 1일이 일요일이었기에 휴가를 쓰지 않고도 다녀올 수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홍콩엘 가서 1박만 하고 온다는 개념이 없었다. 보름 간의 긴 휴가 끝에 다시 휴가를 내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하룻밤만 자고 오자니 그건 또 싫었다.
결국 격렬히 고민을 하던 어느 밤 “올해는 가지 않겠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무슨 변덕인지 만우절을 코 앞에 둔 3월 30일 금요일 오후에 외근을 가는 택시 안에서 덜컥 마일리지 티켓을 결제해버렸다.
제휴사업을 접으러 가는 비장한 걸음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상암동에서 강남으로 가는 강변북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정체가 심각했고, 함께 외근을 간 팀원들과 나누는 회사와 업무 이야기도 그 날따라 지루했다. 그래서 빈자리가 없겠지 하면서 심심풀이로 항공사 애플리케이션을 열어보았는데, 누군가의 취소표였는지 딱 한자리가 나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도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는 마일리지 좌석이 출발 하루 전에 나타나다니. 순간, 이건 이쯤 되면 레슬리가 나를 부르는 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닭살이다 싶겠지만.
다음날인 토요일 새벽, 1박의 짧은 일정이라 짐이랄 것도 없이 단출하게 가방을 꾸려서 집을 나섰다. 이렇게 짧은 홍콩 여행은 처음이었고, 이렇게 즉흥적으로 가는 홍콩 또한 처음이었다. 언젠가는 당일에 출발하는 티켓을 구입해서 홍콩으로 날아가겠다는 로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 월급쟁이가 그런 여행이 쉬운가.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아마도 가장 즉흥적인 여행일 것이라며 기대 반 흥분반 그렇게 짧은 여행은 시작되었다.
출국 게이트에서 내리자마자 유심칩 한 장을 구입해서 곧장 센트럴로 달려갔다. 4월 홍콩은 이미 공기가 축축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지만, 이 날은 청명한 하늘에 바삭바삭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꼭 서울의 봄날을 옮겨놓은 것 같았다. 센트럴의 공중회랑을 걸으며 오늘은 무얼 할까 고민했다. 내일은 4월 1일이라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로 가야 하고, 그렇다면 오늘은 무얼 할까. 잠깐의 고민 끝에 미드레벨 중턱에 있는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는 곧장 버스를 타고 코즈웨이베이로 향했다.
코즈웨이베이는 홍콩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네 중 하나다. 구석구석 복잡한 골목 사이사이에 펼쳐진 재미난 상점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고, 조금 더 걸으면 타이항이라는 요즘 뜨는 동네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단은 코즈웨이베이를 돌면서 몇 가지 쇼핑을 하기로 하고 패션워크 쪽을 향해 걸었다.
걷는데.. 문득 기분이 좀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멜로디...
어머? 이거 국팔씨잖아?
두리번거리며 소리가 나는 쪽을 찾아보니 웬 트럭이 한 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세워진 대형 모니터에는 레슬리의 라이브 공연 비디오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의 오랜 팬들이 준비한 이벤트였다. 아, 생각해보니 버스가 정차된 곳은 일본계 홍콩 레코드 체인인 HMV의 코즈웨이베이 지점이었다. 지금은 패션워크라는 거대한 패션 벨트의 위세에 눌려 규모가 작아졌지만 예전에는 꽤 규모가 있는 매장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트럭을 살펴보았다. 내부 공간의 반은 레슬리의 사진들로, 나머지 반은 투명한 아크릴 판에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적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아, 역시 오길 잘했어! 하며 감격했다. 그리곤 버스 앞에 못 박힌 듯 서서 차례로 재생되는 영상을 보았다. 그중에는 이덕화가 “부탁해요!”라는 특유의 유행어로 소개한 토토즐 무대도 끼어있었다.
새삼 더더욱 감개무량해서 이 장면을 찍어 내가 홍콩에 왔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송했다. 그러자 영상 속 한글자막을 본 친구에게 돌아온 답변, “뭐야, 홍콩이 아니라 서울에서 한 행사에 간 거였어?”
얼마나 버스 앞에 버티고 서 있었을까. 영상 몇 개를 홀린 듯이 보다가 버스에 올라 나도 레슬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MISS YOU MUCH.”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그의 사후에는 그를 기리는 팬들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되어 버린 말. 특별할 것 없는 메시지를 남기고 버스 안을 아주 천천히 둘러보고 나왔는데도 이상하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릴없이 버스 앞에 붙은 안내문구를 들여다보는데 누군가 내게 광동어로 말을 걸었다. “광동어 못하는데요”하고 영어로 답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단체티셔츠를 입은 이 이벤트를 주최한 팬클럽의 멤버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내일 센트럴에서 레슬리와 관련된 장소를 함께 걷는 걷기 행사가 있다며 나를 센트럴로 초대했다. 마침 센트럴에 갈 계획이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출발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고 나니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그를 기억하기 위해 오늘 홍콩에 왔다고 설명하니 그녀가 빙그르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나 역시 팬이기에 그 고맙다는 말이 적절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고마운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도 그녀에게 빙그르 웃어주었다.
“나도 고마워요, 정말로.”
그녀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 순간 그녀와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내일 꼭 오세요”
그리고 그녀는 내 손을 짧게 꾹 잡았다 놓은 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팬들과 인사를 하러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쇼핑을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결국 내가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것은 누군가와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통성명 따위 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3-4 분쯤 되었을까 싶은 짧은 대화였지만 마음을 나누어서일까. 그녀와의 이 순간은 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월요일 0시 5분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인천에 도착해서 집에 짐을 풀고 샤워만 한 뒤 곧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 그래서 나는 홍콩에서의 1박을 잠으로 충전하기로 했다. 그래서 쇼핑을 하고, 길바닥에 펼쳐진 간이식당에서 홍차와 커피를 섞은 원앙차를 마시고 타이항 뒷골목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다가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잠이 오지 않았다. 갈수록 말똥말똥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한 시간쯤 뒤척이다가 결국 다시 옷을 꿰어 입었다. 어디를 가도 애매한 시간이라 다시 잠이나 잘까 하던 차에 갑자기 스텁스 로드가 떠올랐다. <영웅본색2>에서 레슬리가 딸의 이름을 지어주고는 세상을 떠났던 그곳.
그 길로 로비로 내려가 택시를 잡아탔다. 밤 10 시가 넘은 시각,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가 혼자 택시를 잡아타고는 스텁스 로드 전망대를 가자고 하니 기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몇 번이고 스텁스 로드가 정말로 맞냐고 확인을 하고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액셀레이터를 밟는다.
그곳은 빅토리아 산에서 홍콩섬을 내려다보는 전망대 중 하나인데, 때문에 미드레벨의 중턱에 있는 호텔에서 전망대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드라이브 코스였다. 북악 스카이웨이 저리 가라 싶게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차를 세운 기사는 정말로 여기 오려고 한 게 맞는지 다시 한번 물었다.
“네, 맞아요 여기.”
차에서 내려보니 전망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무도 없다. 장국영이 아내와 통화했던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에는 전망대 관리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고, 낮에 강렬한 태양을 피할 수 있도록 원형벤치 위에는 차양이 드리워져 있다. 전망대 앞의 나뭇잎들이 무성해서 모든 곳에서 야경이 훤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빅토리아 피크와는 또 다른 전망을 보여줬다. 검은 천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색색의 비즈를 한껏 뿌려놓은 것 같은 야경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 때리고 서 있었다. 아 내가 이래서 홍콩을 사랑했었지.
그런데 관리사무소에서 왕왕 울려대는 TV 소리가 정취를 깬다. 도대체 숨은 쉬는 걸까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TV 속 여자의 목소리에 어이없이 웃다가 낮에 산 샤오미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영웅본색 2>의 주제곡 <分享未來日子(분향미래일자/내일을 향하여)>를 선택해놓고 ‘1곡 반복’ 버튼을 눌렀다. 이내 광동어로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귓속으로 레슬리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無謂問我今天的事
오늘의 일을 나에게 묻지 마세요...
비록 영화에 나왔던 그때 그 모습과는 딴판이 되었지만, 나는 마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눈은 야경을 보고 있는데, 머릿속으로는 공중전화부스 속 레슬리의 모습이 계속 재생되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을까. 이어폰을 빼고 주위를 돌아보니 드라이브를 하다가 잠시 멈춰 선 커플 두세 팀이 서로를 부려 안고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택시기사가 정말로 이곳에 가는 것이 맞느냐고 거듭 물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여자 혼자 청승맞게 찾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데이트 코스였던 것이다.
주변에 커플들이 있다는 것을 한 번 의식하고 나자 더 이상 <영웅본색> 주제가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내 택시를 잡아타고 완차이로 발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