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1일 (2) - 센트럴의 장국영 버스킹

나의 레슬리 ep34 : 장국영과 함께 걸어온 시간들 (5)

by 장지희

드디어 4월 1일, AEL 역에 짐을 맡기고 장국영과 매염방의 합동 회고 전시회에 들렀다.


<芳華年代(화려한 시절)>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전시 또한 전날 코즈웨이베이와 센트럴을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처음 가보는 지하철역에 내려서 아파트 단지를 지나 꽤 걷고 나니 전시장에 도착했다. 전시장 바닥에는 레슬리의 영어사인 동영상이 쉼 없이 재생되고 있고, 중앙에는 레슬리와 매염방의 모습이 이분할 화면에 가득 흐르고 있었다.


화면 앞에 놓인 벤치에 한참을 앉아 뱅글뱅글 반복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몇 번이고 바뀔 동안 나는 무념무상, 계속 화면만 바라보았다. 다음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서.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했던 그들의 젊은 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시 MTR을 타고 센트럴에 있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로 향하는 길.

아, 그런데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홍콩섬의 센트럴은 일요일이면 일주일에 단 하루 휴가를 받는 필리핀 가정부들이 온종일 모여 노상에서 수다를 떨고 밥을 먹고 춤을 추는 바람에 북새통이 되곤 한다. 거기에 정체 모를 플래시몹 행사까지 겹쳐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AEL역이 위치한 IFC 몰에서 호텔 근처로 이어지는 공중회랑을 따라 걷는데, 보행방향을 무시하고 사방에서 부딪혀오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지수가 끝 간 데 없이 올라간다. 평소 같으면 5 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인데 인파를 헤치며 걷자니 시간이 한참이다. 거기에 온갖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고 사방팔방에서 온갖 언어들이 왕왕거리며 귓가를 울린다. 으악, 살려주세요.


드디어 공중회랑에서 만다린 오리엔탈로 연결되는 도로로 내려가는 출구가 보인다.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니 호텔 앞에는 벌써부터 도착한 팬들이 준비한 꽃이며 포스터,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인파들이 멀리서도 확연히 보인다. 아, 올해도 여전하구나 싶은 마음에 안도의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사실 매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추모행렬이 가장 화려했을 때가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갈 때마다 조금씩 약소해지는 규모를 보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 4월 1일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홍콩을 찾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늘 불안한 마음이 있는가 보다. 이곳에 와서 인파로 북적이는 호텔 앞을 볼 때마다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을 보면.


얼른 가서 나도 저 인파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해야겠다 하며 부지런히 걷는데, 나를 스쳐가는 백인 남자 두 명이 하는 대화가 들린다.


“와우, 저게 다 뭐래?”

“아, 어떤 캔토니즈 가수가 자살한 데래”


그 말을 듣는데 순간 가슴이 텅 하고 내려앉았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레슬리는 캔토니즈 가수도 맞고, 이 자리에서 세상을 떠난 것도 맞다. 그런데 “캔토니즈 가수가 자살한 곳”이라고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압축해버린 무심한 문장이 이렇게 아프게 다가올 줄이야. 기승전결 없이 그저 ‘결’만이 존재하는 설명이라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떻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내가 정확히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들이 ‘장국영’이라는 입체적인 존재를 지워버리고 그를 캔토니즈 가수라는 일반명사로 칭해서인가. 아니면 ‘자살한 곳’이라는 말의 가볍고도 가벼운 표현이 싫었던 것인가. 둘 다 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이유인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멍하니 멈춰 섰다가 뒤에서 밀쳐오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무의식적으로 걸으며 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들도 수없이 이런 일들을 경험했겠지. “병 걸려 죽은 로큰롤 가수”라던지 하는 무심한 말들로 그들 또한 얼마나 상처 받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엘비스 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 아무리 내 손톱 밑의 거스름이 제일 아프다지만,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모든 일들을 이렇듯 무심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맞지 않다면 또 과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모두가 상처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저 나의 국팔씨를 만나러 왔을 뿐인데, 그 목전에서 예기치 못하게 너무 커다란 명제를 만나버린 느낌이 들었다. 휘적휘적 걸어서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하자 어서 오라는 듯 입구에 세워진 포스터 속 장국영이 특유의 미소로 나를 맞는다. 순간,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겼던 생각들이 모두 느슨해진다.

아, 나의 국팔씨. 나는 무력한 얼굴로 그 미소 짓는 얼굴에 인사했다.

“안녕. 나 왔어요, 국팔씨.”



장미꽃으로 만든 레드 슈즈. 누구신지 몰라도 리스펙입니다! (-.-)b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맞은편에는 생전의 장국영이 좋아했던 브랜드라는 던힐 매장이 있다. 대궐처럼 차려진 색색의 꽃과 포스터와 메시지의 행렬을 몇 바퀴씩 돌고 나서 늘 그렇듯이 던힐 매장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하릴없이 앉아서 오가는 팬들을 지켜보고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고 별반 다를 것 없는 그 거리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또 찍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제 코즈웨이베이에서 만난 팬이 알려준 걷기 행사의 멤버들은 보이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상대에게 연락을 할 방법이 없다니. 삐삐를 확인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을지언정 이렇게 무작정 누군가를 기다려본 것이 얼마만인지 헤아려지지도 않았다. 5분만 더, 5분만 더... 하며 기다렸지만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레슬리를 기리는 걷기 행사는 나 혼자 하기로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센트럴 일대의 스팟들을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이것도 나쁘지 않은 추모의 방법이구나 생각했다. 이건 어느 영화에서 나온 곳이었지 하면서 둘러보다가도 맞은 편의 식당에 불쑥 들어가서 밀크티를 한 잔 마시기도 했고,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도

건너편 매장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홀린 듯이 들어가서 덥썩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영화 <시티 보이즈>에 나왔던 거북젤리집 근처에 다다랐는데, 무슨 행사라도 하는지 가게 앞이 인파로 북적였다. 마치 마라톤대회의 중간기점에서 물을 받아 마시려고 줄을 선 선수들 같았다. 정말로 마라톤이라도 하나 싶어서 일행들을 훑어보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내가 기다렸던 '장국영 걷기 대회' 참가자들이었다. 아마도 예정보다 출발이 많이 늦어진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레슬리의 얼굴이 그러진 깃발도 보이고, 뭔지 모를 포스터를 둘둘 말아쥔 사람도 보인다. 정확한 루트는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마주치는 것을 보니, 그들이 가려는 곳들이 내가 다녀온 길과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함께 걸은 것으로 치자, 하며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일정은 역대급으로 짧았지만 꽤 밀도 있는 여행이었다. 이제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

저녁시간을 침사추이에서 보낸 뒤 루프탑 버스를 타고 센트럴로 넘어오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디서 인지는 모르지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색소폰 연주의 멜로디가 말도 못 하게 귀에 익다. 이게 무슨 노래지? 하며 멜로디를 따라잡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따라서 흥얼거리고 있다.


어머? 이거 레슬리 노래잖아!


<共同度過(공동도과)>라는 노래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센트럴 피어에서 IFC 방향으로 이어지는 공중회랑에 버스킹 판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이런 경험을 절대 놓칠 수 없지,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냅다 뛰었다.





버스킹의 주인공은 키보드에 색소폰까지 각종 악기를 차리고 선 중년의 남자 넷이었다. 내가 도착할 때쯤엔 영화 <금지옥엽>의 주제가인 <追(추)>와 <一生一世(일생일세)>가 차례로 연주되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팬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나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가 한곡 끝날 때마다 팬들의 엄청난 환호가 이어졌고, 다음 노래 신청곡들 또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몇 곡이나 따라 불렀을까, 마음만은 이곳에 선 채로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성큼성큼 다가오는 출국시간 때문에 나는 도중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공항으로 가는 내내 귓가에 색소폰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음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새삼 느꼈던 순간이었다. 단체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중국 본토에서 온 한 무리의 팬클럽과 개인적으로 홍콩을 찾았다가 나처럼 우연히 삼삼오오 모여든 팬들과, 그저 길을 지나다 마주친 추억의 노래에 걸음을 멈춰 선 홍콩 사람들까지. 이 공통점을 찾기 힘든 사람들이 한밤중의 거리에 멈춰 서서 행복한 얼굴로 함께 노래하는 광경이란.



실은 내게 타임슬립에 대한 상상을 할 때마다 꺼내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레슬리를 직접적으로 구할 수 없다면, 그에게 살짝 미래를 보여주기만 해도 되지 않을까. 그가 떠난 세상을 슬퍼하는 주변 사람들과 팬들의 모습을 보여주면, 그것만으로도 그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치하고도 단순한 생각.


하지만 이 날 밤의 경험은 오래도록 품어온 구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슬픔이 지나간 후에는 비록 아쉬운 마음일지언정 이렇게나 행복하게 그를 기억할 수 있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2013년 장국영의 10주기 기념 콘서트의 마지막이 표현할 방법 없는 아쉬움과 허무함이었다면 2018년 4월 1일의 마지막은 아쉽지만 행복한 마음이었다.

세상을 떠났지만 이런 마음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알면, 그도 분명히 행복해하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까지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고민한 것이 무색하도록 꽉 찬 여행을 마치고 인천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오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여행을 갈까 말까 싶을 때는 무조건 가라는 말은 역시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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