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만복 Sep 16. 2022

하얀 괴물

산타클로스는 어디로 갔을까 #1

평범한 저녁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눈은 마치 땅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하얀 괴물 같았다. 


한 스푼의 따스함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풍경 속에 작은 집 하나만이 희미하게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아이가 창가에 서서 떨어지는 눈들을 헤아리고 있었다.


아이의 호기심은 창문을 뿌옇게 서리게 만들었지만, 바깥 풍경눈동자에 담기에는 조금의 어려움도 없었다. 밖은 스산한 바람이 안으로 들여달라며 떼를 쓸 뿐, 어떠한 생명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


아이가 자주 보던 떠돌이 고양이를 걱정할 때쯤 부엌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그러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여자의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부엌에는 온갖 식재료들이 질서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요리의 단계라고 보기에 어려울 만큼 조금의 진전도 없었다. 여자는 싱크대에 양팔을 거친 채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뱉고 있었다.


여자는 사교파티에 어울릴법한 고급지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어울리지 않게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지 얼굴에는 촌스러운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이가 인기척을 내자 그녀는 성의 없는 손짓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식탁에는 케케묵은 낡은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빠랑 같이 트리 좀 꾸며주렴."


여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아이는 곧장 상자를 들었다. 상자는 아이가 들기에 조금 버거운 무게였지만, 아이는 씩씩하게 상자를 들고 남자가 있는 현관으로 향했다. 남자는 금방 외출이라도 할 듯 고급 정장을 입고, 상기된 얼굴로 누군가와 다투듯이 통화하고 있었다.


아이는 남자 앞에 보란 듯이 서서 상자를 보여주었지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아이는 흔한 일인 듯 한마디 대꾸하지 않고 상자를 들고 트리가 있는 거실로 향했다.


트리는 이파리가 거의 떨어져 나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드러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보다 오히려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는 괴목에 가까웠다. 아이는 들고 온 상자를 트리 앞에 힘들게 내려두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먼지와 장식용품이 가득했다. 아이 혼자서 장식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양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개의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바로 트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방에서 여자아이가 나왔다. 여동생이었다. 아이보다 두 뼘 정도 더 작아 보이는 동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와 트리를 장식하는 일을 도왔다.



"오빠, 산타클로스 본 적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동생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속말하듯이 아이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동생의 물음에도 아이는 관심 없다는 듯 눈길 주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친구들이 그랬는데 산타클로스 같은 건 없대."

"작년에 산타클로스한테 인형 받았잖아."

"그건 우리 엄마 아빠가 산타클로스라서 그렇대."


두 아이는 고개를 내밀어 현관과 부엌에 있는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열을 내며 한창 통화 중이었고, 여자는 싱크대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상상하는 산타클로스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음.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네."


동생이 실망 반, 다행 반 섞인 한숨을 쉬며 혼잣말하자, 아이도 인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트리를 장식하는 일이 점점 손에 익었는지 상자는 벌써 절반 정도 비워져 있었다. 그러나 트리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닌, 온갖 추진장치를 잔뜩 달고 발사를 준비하는 로켓 같았다.


트리가 아이보다 훨씬 커서 아이는 주로 트리 중간 부분을, 동생은 트리 아래 부분을 주로 장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두 아이는 트리의 외관보다 장식하는 일이 더 중요한 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맞다. 오빠! 그거 알아?"

"또, 뭐?"


아이가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동생은 나뭇가지보다 작은 손가락으로 부엌 쪽 천장을 가리켰다.


"저 다락방 올라가 본 적 있어?"

"다락방?"


동생이 가리키는 곳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환풍구가 보였다. 저 환풍구 너머가 정말 다락방인지, 애초부터 집에 저런 환풍구가 있었는지 아이는 알지 못했다. 처음 보는 환풍구의 모습에 아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한 번도. 너는?"

"나도 안 가봤어."


뻔뻔한 동생의 대답에 아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장식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자 동생은 부엌 쪽을 힐끗 살펴보더니 속삭이듯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다락방에서 내려온 걸 본 적 있어."

"어, 엄마가?"

"응. 그런데 엄마가 이상했어."


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동생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얄밉게 짓던 으쓱한 표정과 달리 동생은 금세 눈물을 터트릴 듯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마가 울고 있었어."


동생의 말에 아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젊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저녁 준비를 하지 않고 한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왜 울었는지 물어봤어?"

"괴물 때문에…."

"괴, 괴물?"


뜬금없는 동생의 대답에 오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동생을 바라봤다. 어느새 동생의 코와 볼은 붉게 부풀어있었고, 눈가에는 작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응. 괴물. 저 다락방에는 괴물이 살고 있는데, 너무 불쌍해서 슬프다고."


동생이 차분하게 말을 마치자 아이는 다락방이 있다는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작은 환풍구 틈새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는 왠지 괴물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장식용품으로 가득 차 있던 상자는 어느새 전부 비워져 있었다. 동생은 상자 바닥에 깔린 자기 얼굴만 한 별을 들어 보였다. 트리 맨 꼭대기에 장식해야 할 별이었다.


아이는 그것을 건네받아 트리에 손을 뻗어보았지만, 아직 덜 자란 키로 트리 끝에 닿을 리 없었다. 트리에 별을 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거듭 실패하자 아이는 들고 있던 별을 낡은 상자 안으로 다시 내려두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