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서울역이다. 부산과 서울을 2시간 30분 남짓한 거리로 오갈 수 있다니, 기차를 타면 하루에 전국 일주도 가능할 듯하다. 기차를 좋아한다. 곧 도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서 시계를 바라보는 설레는 시간도 좋고 덜컹거리는 차장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차창 밖의 풍경은 따뜻하다. 강도 산도 구름도 들판도 춤을 춘다. 터널을 지나는 천둥소리도 살갑고 반갑다.
아버지의 직업은 열차 기관사였다. 아버지는 늘 기차보다는 열차 기관사라고 말씀하신다. 여행이란 단어를 붙이면 기차 여행이 어울리고, 기관사를 붙이면 열차 기관사가 어울린다. 증기기관차처럼 동력을 가진 기관차라는 의미가 포함된 기차는 엄밀히 말하면 차량이 열을 지어서 연결되어 있는 의미를 모두 포괄하고 열차 번호를 부여한 열차가 맞는 말인 것 같다. ‘무궁화호 000 열차가 타는 곳 00으로 들어오겠습니다.’처럼 역사 안내 방송은 주로 열차를 사용한다. 뜻이야 같지만, 직업적 사명감을 지닌 아버지는 여전히 ‘열차’라는 말을 사용하신다. 어릴 적부터 새벽에 출근하고 낮에는 잠을 보충하느라 코를 골며 주무시는 아버지를 보며 특별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이웃집에서는 단잠에서 깨어 동네를 누비를 아버지를 보고 처음에는 백수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경주와 대구 곳곳을 누볐다.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집에서 하지 않는 과묵한 편이었지만,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엔 두 딸에게 지역마다 유명한 음식과 가볼 만한 곳을 유창하게 말해주시곤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열차 번호를 줄줄 읊으며 가장 효율적인 노선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비밀스럽게 숨겨 놓은 많은 것들이 있는 대단한 직업이구나 했었다. 사춘기를 지나고 이십 대가 되었다. “열차 함 타볼래?” 아버지가 처음으로 기차 여행을 제안했다. 5월 5일 어린이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어머니와 동생까지 함께 부전역에서 경주까지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맨 앞에 니 아빠 아이가?” 멀리 운전석에서 빼꼼히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기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손을 좌우로 흔들며 환하게 웃어 주신다.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기차 한편에 자리 잡아 다 같이 경주로 향하는 든든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기차는 기대감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장소이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서울과 부산을 참 많이 오갔다. 시험과 면접 장소는 서울에만 있는지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어쩌랴 취업의 문턱은 거리까지 있는 것을. 이른 아침 시작하는 시험 고사장에 가기 위해선 무궁화 열차 막차를 타고 밤새 달려 서울을 갔었다. 오후에 있는 시험을 치를 요약 종이를 들고 KTX 첫차를 타야 하는 날에는 어머니께서 날 기차역에 자주 데려다주곤 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할 줄 알았으나, 기차가 깜깜하고 긴 터널을 향하는 것처럼 끝이 없는 취업의 문턱에서 서글퍼지기도 했다. 부모님이 건네준 따뜻한 두유가 식기도 전에 달리는 기차 안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 운전에 서툴렀던 첫 직장에서의 몇 달간은 이른 아침에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출근지로 향했다.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을 때는 새벽 첫차를 타려고 부산역으로 태워주신 적도 많았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툴툴 거리기도 했는데, 기차는 출발하고 뒤돌아서 계단을 올라가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
여전히 부산 본가는 철길 옆의 아파트에 있다. 원주에서 함께 하는 짝꿍도 철길 옆 동네에 살고 있다. 묘한 인연이다. 기차와 떼려야 뗄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