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시에 그려진 소녀가 마치 아득히 먼 초등학교 때 내 친구인 듯하다.
금자
지붕 이엉 삼사 년이나 거른 집 딸
열세 살 금자란 년
재권 씨네 얼뚱아기 업어주고
하루 세때 밥 얻어먹는다.
빈차리로 마른 등짝과 궁둥이에
아기 달고
누가 뭐라고 하면
큰 눈 노란 눈동자 그렁그렁 눈물 맺어 뚝 떨어진다.
바람 센 날
미루나무 휘어서 잎새 발딱 뒤집힌 날
아기 업은 금자란 년 날아갈까 말까 하며
고래실 논 한복판 건너간다
밥이래야 부뚜막 찬밥 아니면
남은 밥하고 눌은밥에
숟가락 몽댕이로 된장 찍어먹는 식은 밥 이건만
그게 어디냐
이 무서운 보릿고개에
(고은의 시집 <만인보>에서)
그날 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 어느 추운 겨울밤. 누나가 마당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어 방안에 걸어두자 얼었던 빨래가 녹으며 물방울이 방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걸 피해 자리를 옮겨 아랫목에서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사립문에서 마을의 동갑내기 여자애가 나를 불렀다.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니 그애가 앞장서서 고샅길을 걸어 나갔다. 그애와 나는 마을 공터의 볏짚을 쌓아놓은 곳에 바람을 피해 나란히 섰다.
그애가 손에 쥐고 있던 고구마를 내게 건네며 눈짓으로 먹으라 말했다. 겨울 찬 바람 속에서도 고구마는 따뜻했다. 그 시절 밭농사를 짓지 않던 우리 집에서는 고구마가 귀했다. 나는 고구마를 좋아했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그애가 어머니 심부름으로 고구마를 우리 집에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
나는 갑자기 밤중에 불러내 고구마를 먹으라는 그애가 이상했지만 그냥 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말없이 고구마를 먹고 있는데 그애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애는 마을의 또래 남자애들이 놀리면 훌쩍훌쩍 잘 울었다. 왜 우냐? 오늘도 애들이 놀리던? 그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한테 또 야단맞았냐?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훌쩍이기만 했다.
내가 고구마 하나를 다 먹자 그애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고구마를 마저 내게 주었다. 나는 고구마를 먹으며 그애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별이 뜬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찼지만 별빛은 쏟아지듯 가까이 내리고 있었다. 야 인공위성 간다. 나는 별들 사이로 밤하늘을 지나가는 인공위성을 가리켰지만 그애는 고개를 들어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그애와 나는 말없이 서있었다. 그애의 훌쩍임도 잦아들고 바람소리도 잦아들고 이따금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야 춥다 그만 들어가자 내가 말하자 그애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애의 집은 마을의 끝에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애를 집에 바래다준 적이 없었다. 그애와 걷는 고샅길은 내가 그날 학교가 파한 뒤 도롱태를 굴리던 길이었다. 그애와 나는 말없이 걸었다. 길 옆으로 다른 친구의 집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그애의 집 사립문에 이르자 그애는 갑자기 두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장난치듯 마구 흔들더니 잠시 후 손을 놓아주며 잘 가 하고 말했다. 잘 가라는 그 말이 그 밤 그애가 내게 한 말 전부였다. 돌아오는 고샅길의 끝에서 돌아보니 그애는 아직도 문 앞에 서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꼈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음날 그애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애가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나와 다른 친구들 모두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학교가 파한 후 집에 돌아와서 놀러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애가 학교에 오지 않은 이유와 어젯밤에 내게 찾아와 훌쩍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젯밤에 그애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감당하지 못해 울타리를 사이에 둔 이웃 앞으로 서울로 간다는 종이 한 장을 방바닥에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밤 봇짐을 싸서 서울로 떠나버린 것이다.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기로 한 밤. 안방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리 낮춰가며 이고 지고 갈 봇짐을 싸고 있었을 것이다. 이십 리 먼 밤길을 걸어서 서울행 기차를 타러 읍네까지 걸어가야 했기에 배고픔을 달랠 고구마는 부엌 가마솥에서 익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애는 살며시 방을 나와 부엌의 솥뚜껑을 열고 뜨거운 고구마 두 개를 꺼내 두 손에 나눠 들고 먼 고샅길을 걸어 나에게 왔을 것이다. 나를 불러놓고도 말 못 하고 훌쩍이기만 했을 것이다.
그애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다. 시의 금자처럼 그애는 다른 애들이 학교 끝나고 동네 고샅을 휘저으며 놀 때 이웃집 아기를 보아주고 그 집에서 밥을 먹었다. 남자애들은 그애가 남의 집 아기를 업고 있을 때 놀려댔고 그애는 그때마다 훌쩍였다.
시의 바람에 날아갈 듯 가녀린 몸으로 아기를 업고 논길을 걸어가는 소녀의 모습은 그 시절 남의 집 아이를 보아주고 그 집의 부엌에서 식은 밥으로 한 끼를 때우던 내 친구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밤의 슬픔 가득 훌쩍이던 그애의 모습만은 아니다. 나는 그애가 공책 살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논의 참새를 쫒으며 뛰어다닐 때 휘날리던 치마에 그려진 파란색 물방울무늬와 비 온 뒤 길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를 떠올린 작은 손과 등에 업은 아기가 칭얼거릴 때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낮게 불러주던 때의 맑은 목소리와 선하기만 했던 큰 눈을 기억한다.
떠나고 잊히고 다시 생각나는 날들이 쌓여 수많은 세월이 지나버린 지금, 아마 그애는 바람에 휘청거리지 않는 한 여인으로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서울의 어느 곳에서 가끔은 옛일을 추억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어린 날의 그 선한 눈을 지닌 채.
가을 깊은 밤,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다시 갈 수 없는 그 시절과 아름답던 어린 친구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