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보험이다.11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안녕하세요. 이수현 손해사정사입니다. 단기 어학연수 다녀와서 강의 때 저를 해외파라고 소개하며 농담하기도 했지만, 사실 한 달로 영어 실력 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다 잘 알지요. 다만 평생에 단 한 번도 영어 공부에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던 필자가 한 달간 영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떠났습니다. 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오자마자 영어학습지를 신청했습니다.
필자는 매주 방문해 학습지 교사가 진도를 체크해 주는 학습지를 매우 좋아하는 덕에 아들도 초등학생 내내 그 학습지를 했었지요. 방문교사가 사무실에 방문해 간단한 테스트를 하고 하려던 영어에 한자까지 더해서 하기로 결정하고 조금씩 향상될 나의 지적능력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몇 분 후 방문교사한테서 온 문자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수현 씨, 계좌로 입금 부탁해요~”
“네, 송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어리지는 않습니다. 아들이 곧 군대를 가요.”
“아 네. 수현 씨. 입금 확인했구요. 현금영수증 발급해드릴게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내가 고민하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정말 사소한 일이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놨습니다. 내가 기분이 나쁜 게 문제인가? 내가 너무 권위적인 사람인가? 그분이 나보다 나이가 위인 거는 맞아? 그런데 보통 나이가 어려도 고객한테 보자마자 이름을 부르지는 않는데. 내가 예민한 사람인가?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 정작 중요한 업무를 하는데 방해가 되어서 그냥 자신한테 정면으로 물어봤습니다. 너 매주 너를 사무실에서 ‘수현 씨’라고 부르는 사람을 볼 때마다 괜찮아? 사무실인데, 나를 사정사님이라고 부르든가,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래서 바로, 그분한테 죄송하지만 접수한 걸 취소하겠다고 전했더니 이유를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그게 좀 불편했다고 말씀드리니 본인이 저보다 나이가 많고 할머니한테 어르신이라고 하는 외에는 누구나 이름을 불러왔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내가 불편한 게 중요하니까 옳은 건지 그른 건지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일단 입장을 설명하고 취소를 요청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너무 사소한 이유로 내 공부를 포기할 핑계를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한편 후회도 되었습니다. 조호바루에서 영어 공부가 재밌다고 느낄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영어학습지의 시작이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집 주소로 다시 신청하면 다른 선생님이 올테니까 집으로 신청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면 집으로 방문교사가 올 테죠. 그분은 저를 어떻게 부를지 미리 내가 알 수 있을까요? 집에서 방문교사를 만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제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집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 필자를 ‘대표님’이나 ‘사정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필자 집에 매주 방문해 청소를 해주시는 이모님은 필자를 철수(가명) 엄마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반감이나 불편한 감정이 든 적은 없었습니다.
만약, 집으로 방문한 교사가 ‘수현 씨’라고 하는 상상을 해봤는데 그건 괜찮았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던 사람들 다 필자를 “수현 씨”라고 불렀고 10살 이상 차이 나는 외국인 선생님들은 “SooHyun~”이라고 불렀지만, 필자는 “Hi~!” 하고 즐겁게 대답했습니다.
필자가 불편했던 건 “수현 씨”가 아니라 장소였습니다. 사무실은 직원들과 함께하는 공간이고 저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 오래된 선배 사장님도 이곳에서 필자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사무실에서 현재 상주하면서 업무지원을 하는 직원분도 필자보다 훨씬 연배가 높지만 저를 대표님이라고 당연히 부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필자를 개인적으로도 아무 관련 없는 분이 “수현 씨”라고 부르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에서의 이수현은 ‘이수현 대표’ 혹은 ‘이수현 손해사정사’입니다. 만약, 보험사 지점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학습지 교사가 지점장님을 아무개씨 하고 부른다면 어떨까 상상해봤더니 필자 자신이 느꼈던 불편함에 대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수현이 있는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지가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 방문교사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쾌감도 필자가 너무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불편한 마음도 사라졌네요. 그리고 인간이라는 불안정한 존재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네요.
누군가가 나한테 불편함을 드러냈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 자체의 근원적인 결정이 아니라 장소와 상황 등에 대한 불편감일 수 있습니다. 그건 장소와 상황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는 뜻과 함께 장소와 상황이 달라지면 불편함이 편안함으로 바뀔 가능성도 많다는 걸 의미합니다.
영업하다 보면, 많은 사람을 아주 다양한 상황과 장소에서 만나게 됩니다. 필자는 장례식장에서 보험증권을 펼쳐놓고 상담한 적도 있고, 정육점의 큰 도마 위에서 수임계약서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좋은 만남으로 기억되는 그 인연들이 온전히 그 사람이 좋은 상대여서거나 이수현이 좋은 손해사정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난 장소와 상황, 만남의 이유 등 사람 자체가 아닌 다른 것으로 결정된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험한 좋지 않은 만남 속의 사람에 대해 좀 더 가벼운 분노, 가벼운 불쾌함을 가지고 다른 시각으로 그날의 시간과 장소 등을 돌이켜보면서 새로운 만남에서는 그것조차도 배려하고 고려하는 사람이 되어보는 게 어떨까요?
필자는 현재 사무실에서 칼럼 연재 원고 마감에 쫓기고 있는 이수현 칼럼니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