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취에 속아버린 원인 분석
한 인간의 성격이 발달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기질(temperament)이다. 기질은 성격의 무려 약 50%를 설명한다. 기질은 유전적으로 타고났으며 잘 변하지 않고 고정적인 특성을 가진다.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바꾸려고 노력할수록 에너지가 소모되는 역효과만 날 뿐이다. 최선은 자신의 기질을 잘 파악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기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되면 기질의 장점을 더 극대화하고, 단점을 조절함으로써 성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TCI심리검사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전문 심리검사 교육기관에서 TCI(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 기질 및 성격검사) 교육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기 분석을 통해서도 나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 때는 당연히 몰랐고 이제 와서 알게 된 나의 기질은 이러하다. 그리고 이런 나의 기질은 떠올려보면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환장의 티키타카로 나의 객관성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1. 나는 기질적으로 사회적 민감성 특징이 강했다.
* 사회적 민감성 기질
: 사회적 보상신호(타인의 칭찬, 사랑, 인정 등)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전적 경향성
: 사회적 애착에 대한 의존성에서의 개인차
: 장점 - 사교적, 따뜻함/ 단점 - 다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객관성을 잃기 쉬움
초등학교 때 수 없이 많이 했던 생각 중 하나는 '내가 이 말을 하면 이 친구가 상처받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분명 원치 않았는데 그 생각은 머릿속을 침투해서 내 말이 미칠 영향을 생각하느라고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검열하거나 혹은 검열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상대(주로 느낌상 둔해서 상처받을 것 같지 않은 남자아이들)를 가까이했었다.
나는 이렇듯 타인의 감정을 민감하게 파악하는 사람이었고 이런 나의 특성이 가취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잘못 활용되었던 것 같다. 또한 누구에게나 친구가 전부인 학창 시절, 중요한 친구 관계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마음이 너무 커서 다른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2. 나는 기질적으로 위험회피 특징이 강했다.
*위험회피 기질
: 위험하거나 혐오스러운 자극을 직면하면 행동이 억제되고 위축되는 유전적 경향성
: 처벌이나 위험이 예상될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해 행동이 억제되며 이전에 하던 행동을 중단하는 성향
: 장점 - 준비성, 계획성/ 단점 - 많은 걱정,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
나는 학창 시절동안 친구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나는 친구들이 다투고 있어도 가운데에서 중재자 역할을 주로 하는 아이였다.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은 기질뿐만 아니라 보고 자란 환경의 영향도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엄마와 아빠가 부부싸움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엄마랑 아빠가 싸우는 방식은 침묵이었다. 저녁에 분위기가 싸-하고, "밥 먹어" 말 한마디 들리지 않으면 엄마와 아빠가 싸운 것으로 갈음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를 예민하게 알아차렸고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번갈아 엄마와 아빠한테 가서 말을 걸기 바빴다. 나는 중재자였다.
나 또한 갈등이 생기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친구에게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화를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짜증을 낸다던가 주로 천천히 멀어지다가 관계를 끊어버리는 패턴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가취로 인해 갈등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고 가취에 대해 친구에게 물었을 때 "응"이라는 대답을 들을까 봐 걱정되고 불안한 그 마음이 너무 커서 묻지 못했다. 입냄새가 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면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회피했다.
이 글을 적으며 헷갈리는 것은 '순서'이다.
1) 뚜렷한 기질적 특성 때문에(원인) 가취가 나에게 들러붙은 것일까?(결과)
2) 구취 때문에(원인) 나의 기질의 단점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일까?(결과)
1)
TCI 검사에서는 기질의 특성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경우, 그 장단점도 뚜렷하게 나타나며 후자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장단점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자는 성격의 기절적인 부분을 잘 다루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아이에게 맞는 양육태도 또한 조금 더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기질 모두 다른 사람보다 매우 높은 점수로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질적 장단점이 더 두드러지는 편이다. 그런데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나는 아직 청소년 발달단계에 있는 미성숙한 청소년이었다. 굳이 냄새라는 빌런이 없었어도 내면의 갈등이 엄청 많았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뭐가 될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누구나 경험하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그리고 나의 강한 기질적 특성만으로도 분명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태를 틈타 '가취'라는 빌런이 와서 들러붙었을 수도 있다. 성격적으로 성숙되기 전 일찌감치 빌런을 만나서 기질적 단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 말은 즉슨, 가취가 아닌 그 '어떤 것이든'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와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렸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2)
하지만 구취라는 건 생각보다 파급력이 크다. 말을 할 때마다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라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을 하지 못하면 대화가 어렵다. 소통이 어려우면 친밀해질 수 없다. 친밀해질 수 없으면 단절된다. 단절되면 고립된다. 더불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반복적인 스트레서(stresser)는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입냄새'라는 단어 그 자체는 잘 씻지 않았거나 더러운 것을 떠올리게 한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냄새와 연합이 되면서 결론적으로 건강한 신체자아상이 형성되어야 할 청소년 시기에 흠집이 난다. 자아상이 흠집 나면 자존감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내가 부족하다는 느낌' 즉, 수치심을 경험하게 된다. 수치심은 모든 정신장애에 근원이 될 만큼 힘든 감정이다. 그런 면에서 가취는 나의 생각, 감정, 행동, 습관, 태도 등에 어마무시한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래도 내가 가취 빌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큰 감정적인 자극 없이 정상적인 발달단계를 밟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버렸고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잘 성숙해 나갈지, 어른이로 남지 않고 진짜 어른으로 성숙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찌 됐건 그 당시의 객관적인 시각을 잃었던 나는 비밀을 꽁꽁 싸매며 혼자인 감옥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