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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Jun 10. 2024

한국어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

낯선 학교, 낯선 말, 낯선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하루하루 적응해 갑니다

지인들을 만나 학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문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특히 우리 학교와 같이 도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고 소규모 기업체가 모여있는 공단 지역의 학교는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 아는 교감선생님은 본인이 근무하는 학교는 국제학교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다문화 학생 비율이 67%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베트남, 필리핀을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 비중이 높았지만 요즘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국가 출신 아이들 비중이 늘고 있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이들 중에는 고려인들도 있어 겉모습만으로는 알아채기 어렵다.


러시아계 아이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굳건하게 형성되어 있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항상 등하교를 같이 한다.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에도 그들끼리 모여서 러시아어로 대화하며 논다.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혼자라면 소통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겠지만 러시아계 친구, 언니, 오빠가 곁에 있고 언어가 통하는 그들끼리가 편하니까 서로 모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이해가 된다. 그러다 보니 수업 시간 외에 한국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1학년이나 저학년 때 한국으로 온 아이들은 한국어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면 되는데, 5, 6학년 때 한국으로 온 아이들은 교과내용도 복잡해서 어려움이 많다.


학교에서는 이중언어강사와 한국어 강사를 채용하여 아이들 학습을 돕고 있다. 이중언어강사는 5, 6학년 국어, 사회 교과 수업 시간에 투입되어 아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통역하여 아이들 학습을 돕는다. 한국어 강사는 러시아와 한국어에 능통한 강사를 채용하여 교과 외 시간에 한국어 읽기, 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이 속도감 있게 향상되려면 가정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대부분의 러시아계 부모님들은 경제적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거나 아이들 학습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구태여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그들만의 공동체가 굳건하여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경우 돈을 벌면 한국어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니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안타까움이 있다.


아이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싶어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답답하다. 연말이 되면 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다.


1학년 엘라와 2학년 엘리카는 자매다. 생김새가 꼭 닮았다. 언니인 엘리카는 1학년 엘라보다 의젓하다. 한 학년 차이가 나지만 한국어반에서는 같은 공부를 하고 있다. 아침맞이 때마다 엘라는 나를 보면 달려와 안기며 반가움을 표현한다. 점심시간 급식소에서 나를 만나면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사랑합니다" 하고 아는 체한다. "오늘은 무슨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어?"하고 물으면 "그림 색칠"이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3월에는 내가 묻는 말에 배시시 웃기만 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당연했다.


알료나는 4학년 스베타나의 사촌동생이다. 아빠가 매일 학교에 데려다준다. 3월에 아침맞이 할 때 내가 "사랑합니다"하고 인사하면 "네" 대답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면 또 "네" 대답만 했다. 생김새가 꼭 우리 아이들과 같아서 러시아계라고 생각지 못했다. 어느 날 한국어 실력이 좋은 스베타나와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사촌동생임을 알게 되었다. 어떤 말을 걸어도 '네'만 반복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빠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면 '네'하고 대답하라고 말했을까. 낯선 학교, 낯선 말,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알료나는 그렇게 하루하루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르템도 꼭 우리 아이들처럼 생겼다. 겉모습만으로는 러시아계 아이인지 알 수 없다. 아침맞이 할 때마다 내 손바닥을 찰싹 힘차게 치며 하이파이브한다. 얼마나 씩씩하게 내 손바닥을 치는지 모른다. 그 조그만 몸짓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올까 싶다. 그럴 때마다 나는 "씩씩한 모습이 참 좋다"라고 말해주었다. 한국어 배우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가 보다. 장난꾸러기 모습은 온 데 간데없고 큰 고민에 빠진 듯하다. 이렇게 심각할 수가 없다.


배움의 과정은 이렇게 진지한 것이다. 아이들 표정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삐둘빼둘 그림을 그리듯 한 획 한 획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이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겠구나' 싶어 답답하기도 하고 조바심도 생긴다. 하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기다림이 필요한 법이다. 아이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배울 수 있도록 꾸준히 관심을 갖고 말을 건네고 응원하는 것이 학교장의 일이라 생각했다. 앎의 기쁨, 깨치는 기쁨을 아이들도 조금씩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공부가 안되면 적응하기도, 재미를 느끼기도 힘든 것이 한국의 학교 현실이다.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여러 가지 차별과 더 복잡한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익숙한 곳을 떠나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며 도전이다. 부디 이 아이들이 이 모든 터널을 통과해서 오롯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나중에 한국어와 러시아어에 모두 능통하여 한국과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욕심도 갖게 된다. 그리고 가깝게는, 2학기쯤에는 교장실에서 간단한 그림책을 함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국어 배우기에 심각한 러시아계 아이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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