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진은 베이징 남동쪽에 있는 도시로 베이징에서 차로 가면 약 2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2005~6년 당시 텐진은 중국 최대 공업도시 중 하나였는데, 전자, 금속, 석유화학, 섬유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텐진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철수한 공장이 많아 수가 크게 줄긴 했지만, 우리 회사와 계열사의 공장들도 그 당시 텐진 지역에 10개도 넘게 가동되고 있었다.
우리 회사의 공장들이 많으니 당연히 텐진에 출장 갈 일도 많았다. 다만 텐진에 출장을 자주 다니긴 했어도 텐진에서 숙박을 했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2시간 거리의 베이징에 집이 있으니 굳이 텐진에서 숙박하지 않고 편하게 베이징의 집에 와서 숙박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숙박을 하고 이른 아침에 텐진으로 가는 경우 크게 불편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베이징-텐진 간 고속도로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봉쇄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빈번했던 것이다. 어떤 지형적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텐진 공장지대의 스모그가 영향을 미쳤던 것인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베이징에서 남동쪽 텐진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유독 짙은 안개가 자주 발생했었다.
그런데 안개가 끼는 날은 차 속도를 조절해 천천히 이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아예 고속도로에의 진입 자체부터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경찰이 완전히 도로를 봉쇄해 버렸기때문이었다. 도로를 봉쇄해 버리니 당연히 안개로 야기되는 교통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는데, 경찰이 정말 시민의 안전을 걱정하고 배려해서 그렇게 봉쇄를 했던것인지 아니면 그저 문제 생기면 귀찮으니 아예 도로를 막아버렸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천진의 업무 일정에 맞추어서아침 일찍 서둘러서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까지 왔는데 그렇게 도로가 봉쇄되어 있으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텐진이 베이징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항구이기 때문에 베이징의 외항처럼 되어 있어 텐진항과 베이징을 오고 가는 대형 트레일러나 컨테이너들도 꽤 많았는데, 이렇게 도로가 봉쇄되면 일반 승용차뿐 아니라 이런 대형 차량들까지 모두 고속도로 진입로에서봉쇄가 풀리기만을 마냥 기다렸다.
한국 같으면 뭔가 다른 길을 찾아 떠났을 차량들이 많았을 것 같지만, 그곳에서는 그런 차량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니 소문은 많았지만 실제로 중국에 와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웠던 중국인의 '만만디(漫漫地)'를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것 같기도 했었다.
내 차 중국인 기사에게 다른 길이 없냐고 물었더니 있기는 한데 길이 안 좋아서 그 길을 택하면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이 높고 또 안개는 통산 오전 10시 전후에 사라지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렸다 고속도로를 통해 가는 것이 훨씬 더 빨리 텐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몇 차례 안개로 인한 그런 도로 봉쇄를 직접 당해보고 나니, 이후에는 그렇게 도로가 봉쇄되면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걸 포기하고 2~3시간 정도 운전기사와 함께 느긋하게 차 안에서 모자란 잠이나 실컷 더 자곤 했었다. 거래선이나 회사에서도 도로가 그렇게 봉쇄된 것을 알고 있으니늦게 왔다고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요즘은 좀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아침에 텐진 가는 고속도로는 한마디로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그런 짜릿함과 섬찟함을 만끽하는 길이었다. 기본적으로 그 당시 중국인의 운전 습성이 요즘보다는훨씬 더 험했던 것도사실이었지만 텐진지역은 공장이 많아 텐진항과 베이징을 오가는 트럭이 너무도 많아서 고속도로는 항상 초대형 트럭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대형차 기사들의 운전 습성 역시 너무험악했던 것이었다.
물론 텐진 오고 갈 때 내가 운전한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고용한 조선족 기사가 운전을 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 많은 대형 화물차들 중 하나와 정말살짝만이라도 부딪히게 되는 사고가발생해도트럭들에 비해 너무도 작은 차 안에 있던 기사와 나 모두 어차피 동시에 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는 신세였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당시의 아찔했던기억이 다시떠오르고 그때겪었던 스릴감도역시 새삼 다시 느껴지는 것 같다.
텐진에서는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장기 이식을 주로 하는 전문 병원을 방문했던 기억이다.
회사 후배로부터 그의 아버님이 천진에 있는 병원에서 장기 이식을 받는다는 연락이 와서 병문안차 두 차례 방문하면서 그 병원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텐진 변두리에 있는 꽤 작은 병원으로 생각하고 병원에 갔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그 병원은 병실만도 300개가 충분히 넘어 보이는 고층 건물의 대형 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전 세계에 장기 이식 전문병원으로 알려져 있어 자국에서 수술을 받지 못한 수많은 외국인 환자들이 이곳에 와서 장기 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했다. 이식 수술을 받으러 온 외국인이 너무나 많다 보니 병동 안은 마치 백인, 흑인, 아랍인 등 다양한 인종의 전시관 같이 보일 정도였다.
전 세계에서 이 병원으로 수술받으러 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이 병원이 전 세계어느 병원보다도 인간장기공급이 원활했었기 때문이었다.정확한 자료는 공개된 적이 없지만유독 이 병원에서 장기 공급이 충분했던 이유는 매년 수천 명씩 처형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사형수들의 장기 중에 상당 부분이 끊임없이 이 병원으로 공급되기 때문인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년간 수천 명이라는 엄청난 건의 사형이 집행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또 사형이집행돼도 사전에 사형수가 동의를 하지 않는 한 사형수 장기 적출이 불가능한 국가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달랐다. 인구가 14억이나 되다 보니 장기가 적출될 수 있는 사형수의 숫자도 타국 대비 절대적으로 많았지만, 이식되는 장기가 사형수 당사자의 동의를 거쳐서 적출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중국의 현실에서 추정해 볼 때 결국 그 병원에서 사용되던 거의 모든 장기는 사형수 당사자의 동의와는전혀 관계없이 적출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불법적인 장기 적출이 이후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최근에는 중국 역시 사형수의 장기를 본인 동의 없이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지켜지고 있는지는 사실 쉽게 파악할수가 없다.
병동 안에 들어가 보니 죽음에 쫓겨서그 죽음을 피하려고 장기를 찾아 그 먼 중국 텐진까지 와서 간절하고도긴장된 모습으로 수술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니 나 역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다행히 그 긴장된 병동을 벗어나뒷문으로 나오니, 사람들로 붐비는 삶과 죽음의 전쟁터 같은 병동의내부와는 달리인적이 드문 꽤 조용한 공원 같은 공간이 있었다.
병문안을 마치고 먼저 나와서후배를 기다리면서 그 조용한 공간에서 방금 전 봤던 병동 안의 참혹한 모습을 생각하며 거닐다 보니, 문득 인간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과 삶의 문제가 사형수들로부터 적출되는 1kg도 안돼 보이는 작은 살덩이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서도 기를 쓰고 이 병원에까지 찾아오는 것이 국적, 인종, 나이, 성별, 종교와 관계없이 우리 모든 인간이 당면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너무도 미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그 조그만 살덩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삶 역시 허망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배의 아버님은 당시 이식 수술을 잘 받으셨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로부터 약 10년 후 2016년에 다른 병이 발발하셨고 결국 운명하셨다. 하지만 어쨌든 그때 텐진에서 이식받았던 이름 모를 어느 사형수의 장기 덕분에 적어도 10여 년이라는 귀한 시간,다시 말하면 10번의 화사한 봄과 여름을 이 세상에서 더 보시고 떠나신 셈이다....
텐진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텐진이라는 도시가 내가 주로 방문했던 공장들만이 가득한 산업도시가 아니라 문화와 멋 또한 가득한 도시며, 전 세계 최빈국가에서 오늘날 G2라고 불리는 자리에 올 수 있도록 성장하게 하는 데실질적으로 크게기여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라는 인물이 10대에서 20대까지 젊은 학창생활을 보냈던 곳이라는 것이었다.
텐진 갈 때는 항상 회사 일로 갔으니 당연히 회사와 계열사 공장들만을 방문했고 공장 단지를 벗어나 단지 밖의 텐진을 경험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즉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천진 외곽의 공단만을 그간 방문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어느 날 회사 일로 텐진 시내로 들어가야 할 기회가 있었다.
텐진시 중심은 우리 회사 공장들이 있던 공단으로부터는 약 45km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서울역에서 수원역 정도까지 될 만큼 먼 거리였다는 의미다. 사실 텐진 공단이나 텐진시 중심이나 행정구역상으로는 모두 동일한 텐진시에 속해 있다. 하지만 텐진시 면적은 약 12,000㎢로 그 면적이 약 600㎢인 서울의 무려 20배에 달한다. 텐진이 이렇게 넓고 큰 도시다 보니, 처음 가보는 텐진 도심 모습은 그간 줄곧 다녔던 공단이 위치해 있는 텐진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 텐진시는 어디나 공단 근처와 비슷할 것이라는 인식이 굳어 있었는데, 막상 도심에 와보니 그런 선입견이 완전히 깨졌다. 공장들만 즐비하고공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공단지역의 지저분한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 있고 고풍스러운 전통 건물이 가득한 역사와 문화가 느껴지는 또 다른 텐진이 그곳에는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거리처럼 오래된 유럽풍 건물이 많은 거리도 있었는데, 상하이만큼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천진에도 이미 1860년부터는 서구 열강들의 조계(租界)가 설립되어 있었다 한다. 텐진에 조계를 보유했던 국가도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오스트리아 또 심지어 유럽에서 가장 작은 국가 벨기에까지 무려 9개 국가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계가 완전히 없어진 시점은 2차 대전이 종료되는 1945년이었다고 하니, 무려 85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텐진에는 유럽 국가의 조계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던 36년간에도 우리 삶과 문화 심지어 언어에까지 남겨진 일본의 흔적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 보다 두배가 넘는 훨씬 더 오랜 85년간 다양한 유럽 국가 조계가 천진에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었으니, 천진에도 역시 그 다양한 국가들의 문화와 흔적이 깊이 남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이 이제는 이탈리아 거리처럼 때론 관광객을 불러일으키는 관광 상품으로까지 사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거리가 바로 과거 이탈리아 조계가 있던 곳이었다 한다.
※ 내가 텐진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이 2005년부터였이니, 그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찍은 사진들이다.
중국의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1976년 그러니까 벌써 44년 전에 78세에 사망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에 중국의 이인자였는데, 그도마오쩌둥과 같이 분명히 공산주의자였지만 성향면에서 좀 달라 선동적이기보다는 비교적 온건하고 이성적인 성격의 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반도와도 밀접관 관련이 있는데, 중국의 6.25 전쟁 참전을 반대했고, 6.25 전쟁 휴전도 그가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한반도 주변 지역 역사왜곡 정책과는 정반대 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즉 만주 일대는 원래 한국인의 영토였으며 중국이 과거 그 영토를 침공한 것은 명백한 침략전쟁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의 미래를 위해 덩샤오핑(鄧小平)과 같은 개혁과개방을 주장하는 인물을 등용하고 보호했으며 본인 스스로 개혁개방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개혁개방 정책 도입 이후에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미국에 버금가는 G2로 성장했으니, 결국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은 떠났지만 그들이 만든 것들이 결실을 맺어 오늘날 중국인들이 전 세계 유명 관광지를 휩쓸고 다니고 것과 같은 과거와는 너무나도 다른 지위와 부를 향유하면서 살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6년 발발했던 1차 천안문 사건도 바로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애도하는 시민들이 천안문 앞에 집결하면서부터 시작이 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항상 마오쩌둥을 지지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배경부터 많이 달랐다. 마오쩌둥이 성장과정에서 해외 거주 경험이 전무했던 것과 달리, 저우언라이는 일본과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와 당시 중국과는 크게 달랐던 선진국의 실정과 해외 다양한 문화 문물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저우언라이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다녔던 대학이 바로 텐진의 난카이(南開) 대학이었다. 이 대학에는 부속 고등학교도 있는데, 저우언라이는 고등학교도 이 부속 고등학교를 다녔다. 결국 '난카이'라는 이름이 붙은 텐진의 학교에서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까지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고도민감한 시간들을 모두 보냈으니 저우언라이와 '난카이'는 나름 꽤 깊은 인연이었던 셈이다.
공산혁명을 통해 중국의 정치 체제를 한꺼번에 통째로 바꾼 사람은 마오쩌둥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치체제가 바뀌어도 국민의 생활은 그 전과 차이가 없는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가난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저우언라이, 이어서 덩샤오핑과 같은 지도자가 개혁개방 정책을 주장하고 실제 적용하면서 중국인의 경제적 수준이 너무나도 크게 변했다. 그 변화를 주도해 결과적으로 중국인의 삶의 수준을 바꾸게 해 준 저우언라이는 이제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문구는 아직도 텐진의 난카이 대학 교정그의 동상에 남아 있다.
나도 내가 졸업한 학교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있을지 자문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나는 내가 다녔던 학교를 사랑한다기보다는 그런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던 그시절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우언라이는 그 학교 자체를 사랑한다 했으니 매우 각별한 애착을 다니던 학교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학교에 대한 애착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착이 컸었을지도 모르겠다. 베이징에는 마오쩌둥의 거대한 기념관이 세워져있는데,그 안에 마오쩌둥의 시신이 방부처리가 된 상태로남아 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의 무덤은 중국 땅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화장된 후, 그의 유언 그대로 그가 사랑했던 중국 땅 전역에 항공기를 통해 뿌려졌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 유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의 유해도 화장된 후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저우언라이와덩샤오핑 같은 지도자가 없었고,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세력과 같은 인물만 중국에 존재했다면 아마 현재 중국의 모습은 문화 대혁명시기와 같은 교조주의적인공산이념에만빠져서 국민은 여전히가난에 허덕여야만 하는 전 세계 최빈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저우언라이 같은 인물을 중국에 허락했고 그런 결과 중국은 오늘날과 같은 강한국가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권 이후 마오쩌둥과 같은 절대적 권력을 움켜쥔 시진핑은 저우언라이가 선택한 길과는 다른, 어쩌면 마오쩌둥의 길을 답습하는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느낌이 너무도 많이 드는상황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모습에 세계는 부정적이고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시진핑의 선택결과가 저우언라이 보다는 마오쩌둥과 같은 길로 중국을 다시 빠지게 만드는 것은 혹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