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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Jun 10. 2020

다롄, 40년간의 일본의 기억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02)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2. 다롄, 40년간의 일본의 기억


다롄(大連)은 중국 동북지방 요동반도 끝단에 있는 도시로, AD 6세기 말에서 7세기까지 무려 7차례나 치러진 중국과 고구려의 치열한 전쟁에 자주 등장하는 고구려 비사성(卑沙城)이 있었던 지역다.


수(隋) 나라에 이어서 당(唐) 나라까지 중국 통일 왕조와의 6번에 걸친 전투에서 번번이 승리를 했던 고구려는 마지막 7번째 전투 당시 내분에 휩싸이면서 결국 당나라에 패하게 되어 멸망했고 비사성을 포함한 고구려 영토 대부분은 그때 당나라에 빼앗긴 이후 한동안 발해가 지배하고 있던 시기를 제외하면 지금까지도 천년이 넘도록 우리 땅이 아닌 상태로 남아있다.


(비사성과 고구려)

1. https://m.blog.naver.com/phm20/221287928545

2.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01




우리 민족에게는 그렇게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비사성이 있던 다롄을 2006년 여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업무 관련 출장은 아니었고 주말에 1박 일정으로 동료 주재원과 함께 갔었다.


해안 도시인 다롄이 꽤 매력적이라는 소문은 이전부터 익히 들어왔었다. 그리고 실제로 방문해보니 역시 중국 내 다른 도시에 비해 꽤 깨끗해 보였고, 특히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도시였다. 청나라 말기 외국의 치외법권적 권한이 허용되었던 조계(租界)가 우후죽순처럼 중국 여기저기에 들어서기 시작했을 당시, 다롄에도 러시아와 일본의 군대가 번갈아 가며 주둔했었고, 나중에는 장기간 일본에 할양까지  된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기도 했던 다롄은, 고구려 멸망 이후 한족, 거란족, 몽고족, 만주족 등등 다양한 민족들지배를 돌아가며 받아왔다. 그러다 청나라 말 발발했던 청일(淸日)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나라는 1895년에 일본과의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때 대만과 함께 다롄도 일본에 할양되었다.


하지만 당시 시베리아를 넘어 만주 등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 확장을 추구하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조약에 반대하며 삼국간섭(三國干涉)이라 불리는 압력을 행사해 일본의 다롄 지역 할양 취소를 요구했다. 결국 삼국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은 당초 조약대로 대만은 할양받았지만, 다롄 할양은 보류됐다. 그런데 그렇게 일본 할양이 무산된 직후에 이번에러시아가 청나라에 압력을 가하여서 25년간 다롄 지역을 조차하는 조약을 1898년에 체결하였고, 이후 다롄은 러시아의 군항으로서 개발이 기 시작했다.


다롄항 인근에 러시아식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당시 많은 러시아인이 러시아 부동항(不凍港)으로 개발되고 있던 다롄에 와서 거주했때문이었다. 러시아는 당시 다롄 재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모델로 개발을 진행했다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다른 중국 도시들과는 달리 다롄 시내에는 유럽의 도시들처럼 공원과 녹지 공간이  많았 것들이 오늘날 다롄을 중국 다른 도시들과는 좀 다른 색다르고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준 기반이 되었던 셈이다.

 

(다롄의 러시아 거리 모습)

https://m.blog.daum.net/dldml2xhd/15920049




하지만 러시아의 다롄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러일전쟁이 곧이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바로 1905년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 다롄 지역을 다시 뺏어오게 된다. 이후 일본은 다롄 및 인근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라 명명하고 통치하였는데, 우리에게도 그 악명이 익히 알려진 관동군(關東軍)이라는 부대도 바로 이 관동주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라 한다.


한때는 7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일본군이 소속되어 있었다는 관동군 사령부도 이곳 다롄에 있었는데, 이때부터 다롄에 대한 일본 지배가 시작되어 1945년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을 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일본 지배하에 있었으니 다롄에 일본식 건물이나 흔적이 시내 곳곳에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롄시 뤼순에 있던 관동군 기지 모습)

https://kknews.cc/travel/reg3jl4.html

(일본 지배 시 일본이 건축한 다롄의 건물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465336


한편 다롄 일대가 이처럼 위치는 중국 대륙에 있지만 일본 지배를 받는 일본의 영토였고, 만주 일대에서 독립 활동을 하던 한국인들을 철저하게 탄압하던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보니, 다롄은 한국과도 관계가 깊은 도시가 되기도 .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이회영 선생, 신채호 선생 같은 우리의 위대한 애국지사분들 모두가 당시 다롄의 뤼순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고 결국 그곳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시기도 하셨던 것이다.


(뤼순 감옥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kimhakcheon/221864186700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 중국의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여인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고향도 바로 이 다롄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다롄이 그렇게 꽤 오랜 기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그녀가 일본어를 너무나도 잘 구사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답변은 그녀의 아버님이 과거에 일본이 다롄을 지배하던 시절 다롄에 살던 일본인이었다는 것이었다.


1945년까지 일본의 땅이었으니, 당시에는 당연히 다롄에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했었을 것인데 그런 일본인 중 하나가 그녀의 아버님이었것이었다. 결국 그녀에게는 일본어가 모국어였으니 그렇게 유창했었던 것이었. 그런데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더 특이한 사실은 놀랍게도 그녀 어머님은 한국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는 없었는지 한국어는 전혀 못한다고 해야 할 만큼 어눌했다.

 

아마 당시에는 일본 영토였던 한반도에 그녀 아버님이 먼저 왔었고 그곳에서 어머님을 만난 이후 역시 일본의 영토였던 다롄으로 함께 이주했던가, 아니면 다롄에 거주하던 조선족 여인을 만나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다.


매우 조용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체격도 크지 않은 전형적인 한국 미인 같은 여인이었는데, 나로서는 나름 꽤 호감을 갖고 있었고 좀 더 만나보고도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항공사 승무원으로 중국 내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녀야 했던 그녀와의 만남은 오래되지 못하고 연락이 끊겼다.   


사진) 호텔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다롄 여행 시 체류했던 호텔 1층의 정원 모습. 다롄이 일본 지배를 오래 받았다는 선입견을 갖고 봐서 그런지 왠지 일본풍 정원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2006년 7월)


사진) 2006년 7월의 다롄 모습. 지에민류셔(健民旅社) 여관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중국의 지도 거리뷰를 확인해 보니, 사진 속 저 붉은색 여관 건물14년이 지난 최근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최근 거리뷰 : https://j.map.baidu.com/9c/Dl5)




러시아 거리와 오래된 일본식 건물 외에도, 다롄의 유명한 명물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다롄 여성 기마경찰대(大連女子騎警大隊)'다.

 

다롄의 여성 기마경찰대원이 되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신장 170cm 이상 돼야 하는 등 외적 조건도 까다로웠지만, 학력면에서도 일정한 조건을 만족해야만 선발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다롄을 포함하는 동북 3성 지역은 선양법인에서 관장하고 있었는데 다롄을 꽤 잘 아는 이 법인 주재원과 함께 다롄을 방문했던 덕분에 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기마경찰대 훈련장이 있는 곳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훈련장에 가보니 역시 소문대로 그곳은 이미 많은 관람객이 기마경찰 대원들의 훈련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훈련장이 또 일종의 관광지처럼 운영되고 있어서 미모의 여성 기마 대원들과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한 이후 중국은 정말 너무 변해서 이제는 심지어 경찰들의 훈련 모습도 관광 산업으로 개발해서 경제적 수입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현장을 보니 참 대단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면 중국이 어쩌면 한국보다도 훨씬 더 자본주의적인 국가로 변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해변과 녹지가 가득한 다롄시에서 그런 도시만큼 아름답고 늘씬한 여성 기마경찰대원들의 멋진 훈련 모습을 보는 것도 다롄에 대해 갖고 있는 아름다운 기억 중 하나다.


하지만 1994년 창설된 이 기마대는 2013년 한때 폐지가 검토되기도 했었다 한다. 공식적인 이유로는 운영 비용이 과다하다는 것이었다는데, 사실 실질적인 이유는 그보다는 이 기마대가 2012년 중국 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실각했던 보시라이(薄熙來)가 다롄시 책임자로 재직할 당시 창설한 부대였기 때문에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정권이 바뀌게 되면 새로운 정권은 과거의 정권을 부정하고  흔적까지도 지우려고 하려는 현상은 한국이나 중국 모두 공통적인 현상인 모양이다.     


(보시라이 사건과 중국의 권력 투쟁사)

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2236555?sid=104

2. https://blog.naver.com/jhbzsw7e4/221480674002


사진) 다롄 여성 기마경찰대(大连女子骑警大队) 훈련소 모습 (2006년 7월)


(다롄 여성 기마경찰대원의 활동 모습)

https://m.blog.daum.net/cj1625/5989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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